본관은 파평(坡平)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윤관(尹瓘)의 아들이다.
1115년(예종 10) 10월 시어사(侍御史)로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는데, 당시 금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길이 막힌데다가, 또 고영창(高永昌)이라는 자가 요나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동경(東京)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요나라에 함께 사신으로 갔었던 진봉사(進奉使) 서방(徐昉), 하정사(賀正使) 이덕윤(李德允) 등과 함께 귀국하던 도중 고영창에게 붙잡혀 억류되었다. 한편, 이들의 귀국이 늦어지자 고려에서는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 정양직(鄭良稷)을 몰래 보내어 그 사정을 상세히 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동경에 억류당하고 있는 동안 고영창의 핍박을 받아 고영창의 건국을 찬양하는 표문(表文)을 올렸는데, 돌아온 뒤에 이 일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다가 발각되어 탄핵을 받아 징계당하였다. 뒤에 풀려나 남원부사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