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천종(天縱), 호는 봉계(鳳溪).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윤원거(尹元擧)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인조 때의 충신인 윤전(尹烇)의 손자로서 유년시절에 당숙인 윤선거(尹宣擧)와 재종형인 윤증(尹拯)에게 수학하였다.
1681년(숙종 7)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그로부터 3년 뒤 강릉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이어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를 지냈다. 1689년 의금부도사에 재직 중 제주도에 갔다가 당시 그 곳에 유배되어 있던 김진구(金鎭龜)를 만난 일이 화근이 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96년 다시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에 임명되었고, 이듬 해 양성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흉년이 들자 창고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는 한편, 풍속을 교화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고을 세도가의 무고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706년 다시 의금부에 재직하였고 이어 공조정랑을 지냈다.
이듬 해 문의현령으로 있으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고 무명세(無名稅)를 전부 폐지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나, 항상 서민들 편에서 정책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토호의 모함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과 자연을 벗하는 생활을 하였다.
한편 『춘추』에 조예가 깊어 역대 정치의 득실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며, 목민관(牧民官)으로 근무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당시 사회의 제도적 모순과 부정부패, 외침에 대비한 국방정책의 제시 등 국정 전반에 걸친 폐단과 이에 대한 대책을 기록으로 남겼다. 저서로 『봉계문집(鳳溪文集)』 2권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