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송(茂松)이며, 자는 강재(康哉)이다. 무송현(茂松縣) 호장 윤양비(尹良庇)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이 되었으며, 뒤에 내시에 입적한 뒤 충렬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행리(行李)의 공용(供用)을 맡아 사리를 꾀하지 않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여 남은 비용을 국고로 돌렸다.
그 뒤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가, 곧 장흥부의 지사(知事)로 나아가 일본 정벌을 위한 여몽연합군의 전함건조를 감독하였다. 이 일로 순찰사 홍자번(洪子藩)이 천거하여 흥위위장사(興威衛長史)가 되고,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1286년(충렬왕 12) 동계(東界)의 초군사(招軍使)로 파견되었으나, 영월수령을 살해한 적괴(賊魁) 강윤명(康允明)을 잡지 못한 책임으로 파면되었다.
뒤에 다시 복직하여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에 이르렀으나 면직되어 고향에 돌아갔다가,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곧 전민변정도감사(田民辨正都監使)에 기용되었다. 얼마 뒤 충렬왕이 복위하자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正獻大夫國學大司成文翰司學)으로 치사하였다.
청렴결백하여 전중시사로 있을 때는 죽도 먹지 못할 만큼 가난하여 콩으로 배를 채울 정도였으나, 강직하여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