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이원(而遠), 호는 퇴촌(退村). 윤화명(尹化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심(尹深)이다. 아버지는 별좌(別坐) 윤언청(尹彦淸)이며, 어머니는 이찬(李瓚)의 딸이다. 전치원(全致遠)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진사시에 1등,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158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를 거쳐 1588년 정언에 이르렀다. 1589년 지평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빚어진 기축옥사 뒤 시행한 논공행상에 불공평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충훈부 도사로 재기용되어 형조정랑·성균관사·종부시정·정언 등을 역임하고 1596년 헌납에 이르렀다. 이후 장령이 되어 관작으로 상을 주는 것은 공로에 대한 대가이므로 남발해서는 안 됨을 역설하였다. 1599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참찬관으로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우리나라는 궁시(弓矢)가 장기인데 지금의 성제(城制)는 발사에 불편하므로 고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접반사(接伴使)로서 활약하였다.
1599년 우부승지를 거듭 연임하고 접반사 때의 공로로 한 자급(資級)이 올랐다. 이듬해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이 되어 3년 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결과, 1602년 무성군(茂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공조판서에 임명된 이후 호조판서·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판중추부사 재직시 임진왜란으로 불탄 실록을 다시 간행할 때에 지춘추관사로 참여하였다.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무성부원군(茂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06년 서천군수로 나갔다가 도총부도총관을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년)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이후 경기감사를 거쳤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