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진동리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묘역식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시대 남해안 일대의 대표적 무덤유적.
유적
건립 시기
청동기시대
면적
103,761㎡
소재지
경상남도 창원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2006년 08월 29일 지정)
소재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130-1번지 일원
내용 요약

창원 진동리 유적은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묘역식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시대 남해안 일대의 대표적 무덤유적이다. 다양한 모양의 묘역식 고인돌과 무리를 이룬 돌널무덤 등이 발굴 조사되었다. 묘역식 고인돌은 A~K군으로 개별적인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중 가장 규모가 큰 A군의 1호에서는 가장자리에 구획돌을 돌리고 그 안쪽으로 흙과 돌을 쌓은 후 중앙에 지상식의 무덤방이 있으며, 구획돌 바깥으로는 도랑을 돌린 구조가 확인되었다.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에 있는 묘역식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시대 남해안 일대의 대표적 무덤유적.
발굴경위 및 결과

창원 진동리 유적(昌原 鎭東里 遺蹟)은 경상남도 창원시에 자리하며, 태봉천과 진동천에 의해 넓게 형성된 충적지에 입지한다. 2004년 9월부터 2005년 5월까지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발굴 조사하였고, 2006년에 사적 제472호로 지정되었다.

청동기시대의 것으로는 묘역식 고인돌 무리 11개, 기반식 고인돌 1기, 주1 45기, 밭, 구덩이, 돌무지(고인돌이나 돌널무덤 둘레에 보호물로 쌓아 둔 돌 더미) 등이다.

형태와 특징

묘역식 고인돌은 A~K군으로 개별적인 무리를 형성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둥근꼴, 긴둥근꼴, 네모꼴, 긴네모꼴 등으로 다양하다. 묘역은 가장자리에 구획돌만 돌린 것, 구획돌을 설치하고 내부에 돌을 쌓은 것, 구획돌 없이 돌을 쌓은 것으로 구분된다. 또 단독으로 만들어지거나 2~3기가 연접 및 중복된 것도 있다.

규모가 가장 큰 A군에서는 고인돌 9기가 확인되었는데, 이 중 발굴 조사된 것은 A-1호이다. 이것은 직경 20.2m의 둥근꼴 묘역 시설에 도랑이 있고, 묘역의 가장자리에서 중앙으로 갈수록 높이가 높아진다. 묘역 내부는 잔자갈을 쌓은 후 그 위에 흑갈색흙을 여러 번 쌓고 다시 그 위에 돌을 깔았다. 가장자리의 구획돌은 길이 방향으로 세워서 놓았다.

묘역 중앙에서 길이 3.2m, 너비 1.5m 규모의 지상식 무덤방이 확인되었다. 무덤방 내부에서 주2 1점, 주3 3점이 출토되었고, 도랑에서 주4가 반으로 깨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기반식 고인돌은 원래 이 일대에 8기 이상이 무리 지어 분포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파괴되고 2기만 남아 있으며, 그중 1기가 조사된 것이다. 덮개돌 주변에 많은 주5 조각들이 흩뿌려지듯이 출토된 점에서 의례 행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돌널무덤은 밭과 묘역식 고인돌 사이의 공간에 분포한다. 열을 이루거나 2~5기씩의 작은 무리들로 나뉘어져 있다. 무덤방은 벽면을 널돌로 쌓은 것과 깬돌로 쌓은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한편, 창원 진동리 유적의 북쪽 인근에는 1980년에 수습 조사된 무덤에서 주6 1점과 간돌검 1점, 간돌화살촉 2점, 붉은간토기 1점이 일괄로 출토되어 당시에 많은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의의 및 평가

창원 진동리 유적이 자리한 곳은 진동만에서 함안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로인 점에서 해안과 내륙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청동기시대에 경상남도 내륙과의 교류를 통해 이 유적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현재 묘역식 고인돌이 분포하는 곳을 중심으로 묘역식 고인돌 7개소(26기), 기반식 고인돌 1기, 주7 2기, 쉼터 4곳과 탐방로로 이루어진 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마산 진동 유적Ⅱ』(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11)
『마산 진동 유적Ⅰ』(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8)

논문

심봉근, 「경남지방출토 청동유물 신례」(『부산사학』 4, 부산사학회, 1980)
주석
주1

깬돌이나 판돌을 잇대어 널을 만들어서 쓴 무덤. 주로 청동기 시대에 썼다.    우리말샘

주2

돌을 갈아서 만든 단검.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석기이다.    우리말샘

주3

돌을 갈아 화살의 머리에 붙인 첨두기. 신석기 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주로 청동기 시대에 제작되고 사용되었으며, 초기 철기 시대에도 일부가 지속되었다. 원거리의 짐승을 잡는 수렵용으로 사용하였다.    우리말샘

주4

그릇의 겉에 붉은 칠을 바르고 문질러 닦아서 붉고 반들반들하게 만든 토기(土器). 신석기 시대 및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다.    우리말샘

주5

청동기 시대에 사용한 무늬 없는 토기. 지역에 따라 팽이형 토기, 미송리식 토기, 화분형 토기 따위가 있으며 빛깔은 붉은 갈색이다.    우리말샘

주6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비파 모양의 동검. 중국 랴오닝성ㆍ만주ㆍ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우리말샘

주7

선사 시대에, 자연석이나 약간 다듬은 돌기둥을 땅 위에 하나 또는 여러 개를 세운 거석(巨石) 기념물. 2~3미터에서 10미터에 달하는 높이로 족장의 위력을 나타내거나 돌에 대한 원시적 신앙의 대상물 또는 묘비나 지역 경계의 표지로서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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