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용천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용천의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 해 9월 김동식(金東植)과 박초식(朴初植) 등의 권유로 김도원(金道源)·조원세(趙元世) 등 13명의 동지와 함께 보합단(普合團)에 가입하여 의주 동암산(東巖山)을 중심으로 하는 소집책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11월 용천군 안평동 박초식의 집에서 조원세 등과 일제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폭탄 11개를 만들었으며 그 중 8개를 보관하였다. 이후 철산의 문내정(文迺貞)·박여청(朴汝靑)·정양봉(鄭陽鳳) 등에게서 군자금을 적극 모금하여, 1920년 1월 이종영(李鍾榮)·김인영(金仁榮) 등에게 제공하였다.
1920년 8월 선천군 성산사(成山寺)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7명을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관전현독립단(寬甸縣獨立團)과 합류, 활동하였다. 그 해 11월 단원 김도원이 무장계획단원인 조상백(趙相伯)을 만나 두 단체가 제휴하고 서울에서 군자금을 모금할 것을 결의하였다.
보합단 명의로 서울 운니동 변석연(邊錫淵)에게 군자금 3만원을 준비해 두라는 경고장을 발송하였다. 그 뒤 김도원·장정용(張廷鏞) 등과 함께 서울로 잠입하여 무장계획단 책임자인 이종영과 같이 변석연과 담판하여 군자금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약속된 날 이종영·김도원·이성규(李成珪)·장석두(張錫斗)·조상백 등과 함께 변석연 집에 도착하였을 때, 변석연의 큰아들 변덕영(邊德永)의 밀고로 미리 잠복하여 있던 일본경찰에 김도원 등은 잡혔으며, 자신은 피신하던 중 종로경찰서원에게 끝내 잡혀 숨겨둔 폭탄 8개까지 압수당하였다.
1922년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