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요서(堯瑞), 호는 동고(東皐). 이온(李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신(李愼)이다. 아버지는 연산현감 이보간(李輔幹)이며, 어머니는 감찰 윤혼(尹渾)의 딸이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예문관검열을 거쳐 봉교로 승진하였다. 1531년 성균관전적으로 옮겼다가 병조·예조의 좌랑이 되었고, 1537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호조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옥당(玉堂)에 들어가 교리(敎理)·응교(應敎)·집의(執義)를 지냈다.
1544년 직제학·동부승지·우부승지가 되었으며, 1547년(명종 2)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에 올랐다. 당시 권신 이기(李芑)가 권력을 휘둘러 사류(士類)를 죽이거나 몰아내니 사람들이 모두 모른 체하였는데, 이명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대사헌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이기를 탄핵하였다.
1549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2년 대사헌이 되었고, 특별히 대사성을 배(拜)하였다.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어 특진관으로 입시,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의 신원을 주장하여 왕의 승낙을 얻고 그날로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호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57년 좌참찬이 되어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하였다. 1559년 좌찬성, 1564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나이 70이 되어 사직할 것을 청하여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66년 좌의정이 되었다가 선조 즉위 초 나이가 많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