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회(士晦) 혹은 사휘(士輝), 호는 해악(海嶽). 선조의 열두째 왕자인 인흥군 이영(仁興君 李瑛)의 4세손으로, 아버지는 익녕군 이제(益寧君 李梯)이며, 어머니는 안만태(安萬泰)의 딸이다.
사마시를 거쳐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일찍부터 왕족 가운데서 학문에 능한 자를 찾고 있던 영조를 기쁘게 하였다. 문학·정언·사서를 지낸 뒤 충청도경차관으로 나갔는데, 경시관(京試官)을 겸하였으나 부모의 병환으로 그 임무를 소홀히 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다시 기용되어 경연의 시독관으로 재임 중이던 1762년에, 경현당(景賢堂)에서 행해진 주강(晝講)에서 『중용』을 시강하다 실수가 있어 다시 파직되었다.
1763년 재서용되어 부교리·교리·부수찬·수찬 등 청요직을 번갈아 역임하였으며, 암행어사로 해미현(海美縣)을 안렴하기도 하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어사로서의 임무수행이 철저하여 영조로부터 “이명환의 일성(一聲)에 묵리(墨吏)들이 담장을 넘어 도망치니 진실로 어사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저서로 문집 『해악집』 4권 2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