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서림(西林). 자는 방서(邦瑞), 호는 구포(九苞). 아버지는 이현(李玹)이며, 어머니는 탐진최씨(耽津崔氏)로 최송수(崔松秀)의 딸이다.
1708년(숙종 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1년(경종 1) 김일경(金一鏡)·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 등이 주도한 붕당싸움에 휘말려 도리어 무고를 당하여 양덕(陽德)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에 풀려났다. 1723년 문과에 급제한 뒤 이듬 해에 동학(東學)의 훈도(訓導)가 되었다.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여 언론을 구하는 명을 내리자 김일경·조태억(趙泰億) 등의 죄를 통렬히 비판하는 한편, 시폐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1731년(영조 7) 군신 간의 화합을 다지는 의도에서 임금과 신하 16명이 한자리에 모여 시를 짓는 광경을 그린 「군신제회도(君臣際會圖)」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1784년(정조 8) 예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구포유고(九苞遺稿)』 3권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