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8년(우왕 14) 동북면부원수로서 요동정벌(遼東征伐)에 참가하였다가 이성계(李成桂) 등과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뒤 우왕의 후궁들을 모두 사가(私家)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아버지는 모두 멀리 유배를 보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인 조영길(趙英吉)이 몰래 도망나와 개경에 들어온 것을 알고서 보고하지 않았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390년(공양왕 2) 회군공신에 봉하여졌으나, 김종연(金宗衍)과 판사 조유(趙裕)가 이성계를 해치려 한 음모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아 다시 안협(安峽)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 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나 정몽주(鄭夢周)의 일당으로 몰려 다시 탄핵을 받았다.
조선이 개국한 뒤에 곧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다. 1393년(태조 2) 경기우도관찰출척사(京畿右道觀察黜陟使)에 임명되고, 1395년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다음해 축성제조(築城提調)로서 공사감독을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삭직되어 영해부로 유배되었다.
1399년(정종 1) 왜구가 서북면 선천·박천에 침입하자 충청도조전절제사로 출정하였다. 1402년(태종 2) 서북면도순문사·사평부좌사(司平府左使)를 거쳐 서북면도절제사가 되고, 그 뒤 우군도총제를 겸직, 다음해 사평부좌사로 민무휼(閔無恤)과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서 종계변명주본(宗系辨明奏本)을 올렸다.
1404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순금사만호(巡禁司萬戶)를 거쳐, 1409년 형조·호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해 민무휼사건에 관련된 윤목(尹穆)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사형당하였으나 뒤에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