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명은 춘엽(春燁), 호는 신계(晨鷄) 또는 낙산도사(洛山道士). 황해도 문화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6세 되던 해에 보서(寶書)를 얻으려고 중국으로 가던 중 평안도 순안군 적리암 치내에서 한밤중에 ‘천하대보 정진무외 무궁조화 각재자기(天下大寶正眞無外無窮造化各在自己)’라는 16자의 대보송(大寶頌)이 허공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깨친 바 있어 구월산으로 들어간 뒤 10여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였다.
의술·복점·풍수지리서를 탐독하면서 환자를 치료하여 천신선생(天神先生)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의술을 보였다. 그 무렵 해주군 군의(軍醫)로 발탁되었으나 3개월도 못 되어 조선군이 무장해제를 당하자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해주 공략을 행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 뒤 일본 경찰의 수사를 피하여 연안에 은신하면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1913년에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기도를 시작한 지 488일 만인 1915년 4월 15일 정오에 각세도의 원리를 깨닫고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無窮造化解脫死滅永歸靈界)’라는 16자로 된 원각주(圓覺呪)를 얻었다.
그 뒤에도 기도를 계속하여 1918년에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깨달음의 내용은 유불선야(儒佛仙耶), 즉 유교·불교·선교·기독교 등의 모든 종지가 포함되어 있다. 깨달음을 얻은 1915년을 원년으로 삼고 후천에서 사용될 33자를 내놓으면서 포교를 시작하였다.
1921년에는 서울 용산구 도화동에 포교 근거지를 마련하고, 1923년에는 전국에 10여 개의 도관을 설립하였다. 또한, 도헌(道憲)을 제정, 공포하였고, 동서남북 4관제(觀制)와 30암제(庵制)를 실시하여 교세를 크게 성장시켰다. 만주까지 교세를 넓혀 한때 27만여 명에 이르는 신도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체 내에 분열이 생기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져 1938년에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는 동안 교세는 약화되었다. 광복 후 교단 체제를 정비하여 재기를 꾀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54년부터 경기도 시흥의 관악산 아래에서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초막을 짓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