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서울 출신. 1899년 7월에 관립소학교 심상과 3년제를 졸업하고, 이어 1901년 7월에 관립소학교 고등과 2년제를 졸업하였으며, 1905년 6월에는 관립한성중학교 심상과 4년제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즉시 모교인 관립한성중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10년 9월에 관립한성외국어학교 교관으로 전임되었으나, 1911년 8월에 일제의 교육령으로 새로 개편된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가 되어 1925년까지 14년 간 조선어과를 담당하였다.
한편, 일제가 의도적으로 일본인에게 장려하던 조선어교육에도 종사하게 되어 1913년부터 1925년까지 가르쳤으며, 이때 1923∼1924년 조선어연구회의 『조선문조선어강의록』에 조선어문법을 일본어로 집필, 연재하였다. 그 강의는 교직을 물러난 뒤 1926년 4월에 『조선어발음급문법(朝鮮語發音及文法)』이라는 단행본으로 조선어연구회에서 출판되었다. 1929년에 이 책을 보완한 국어판 『중등교과 조선어문전』은 처음 당국의 검정을 받은 고등보통학교용 교과서로 널리 쓰였다.
그의 문법은 3부로 구성된 규범문법으로, 토와 어미를 품사로 구분하는 이른바 제1유형에 속하는 체계이다. 그는 일제하에 일본인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기에 전력한 교육자이기도 하며, 당시 조선어시험을 치려는 일본인을 위하여 이토(伊藤韓堂)와의 공저로 1927년 『조선어제3종수험자필휴(朝鮮語第三種受驗者必携)』를, 1929년 일본인을 위한 『중등학교조선어교과서(中等學校朝鮮語敎科書)』 등을 내기도 하였고, 조선어연구회 편찬 1928년 『일선단어대역집(日鮮單語對譯集)』 및 1930년 『선화신사전(鮮和新辭典)』을 감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1926년 그의 문법서 권두에서 조선어 발달을 위하여 한 팔의 힘이 될 것을 피력하였지만, 1927년 8월 조선사상통신사(朝鮮思想通信社, 사장 이토), 『조선급조선민족(朝鮮及朝鮮民族)』 제1집에 수록된 「조선어(朝鮮語)를 왜 도외시(度外視)하는가?」라는 논문에서는 필수과목인 조선어과를 학교에서 소홀히 한다고 비판하고, 조선어 교과서 내용의 부실에 대해서도 토로하고 있다. 그 말년의 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