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삭주 출신.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이듬해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남만주의 항일전선의 통일을 절감하여 상해임시정부 직할 광복군사령부로 통합되자 김익곤, 장학구, 이명서, 김창곤 등과 함께 사령부 제1영(營) 2중대에 편입되었다.
국내특파원으로 주상옥(朱尙玉)·김태원(金泰源)·김택수(金澤秀)·정창화(鄭昌和) 등과 같이 평안북도 삭주에 잠입하여 대관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창성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경찰 4명을 사살하였으며, 1922년에는 삭주의 대치장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 2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해 김창하(金昌河) 일행과 같이 의주 영산(永山)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장총 2자루, 단총 1자루 등을 노획하고 주재소를 소각하였으나 동지 김병주(金炳周)가 전사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의 군인으로서 동지 4명과 같이 의주에 출동하여 고령삭면(古寧朔面)에서 일본경찰과 교전 끝에 2명을 사살한 뒤 본부로 돌아왔다.
1926년 초산(楚山)에 출동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경성감옥에서 19년 3개월을 복역하고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