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영사건이라고도 한다.
흥선대원군을 하야시키고 집권한 민씨척족정권은 개항과 더불어 개화시책을 서둘렀다. 그런데 무분별한 국고 낭비, 악화되는 관기 문란, 대외개방의 혼선 등이 발생하면서 유림세력의 불만을 샀다.
마침내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이 국내에 반포되면서 유생들의 격렬한 척사위정상소가 계속 이어졌다. 이른바 신사척사상소운동이 격화되면서 민씨정권이 곤경에 처하자, 승지 안기영은 권정호와 함께 국왕폐립의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별군직(別軍職)의 한직으로 물러나 불평을 품고 있던 이재선을 추대하고 위정척사세력과 손잡아 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을 재기시켜 권섭하려고 하였다.
강달선(姜達善 : 嶺南儒疏 관계자)·이두영(李斗榮)·이종학(李鐘學)·이철구(李哲九) 등을 앞세워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며 왜구 토벌을 빙자하여 군정(軍丁)을 모집하고 군기를 모으려 하였다.
명목상 왜구 토벌을 내세운 것은 민심에 영합하고 척사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병과 군기의 입수가 여의치 않자, 9월 13일 경기도 감시(監試)에 모여든 과유(科儒)들을 대원군의 이름으로 위정척사를 선동하여 이들을 3대(隊)로 나누어 왕궁을 습격, 국왕폐립을 단행하려는 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는 준비미비로 계획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계획 실패를 예측한 대원군이 강달선·이두영·이종학 등을 다른 죄로 형조에 고발, 유배시켜 음모에 연루됨을 피하는 한편, 음모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돌리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9월 20일 음모에 참여하였던 광주산성장교(廣州山城將校) 이풍래(李豐來)가 포도청에 고변하여, 일당 30여 명이 체포되어 국문 끝에 안기영·권정호·강달선·이두영·이종학·이철구·이종해(李鐘海)·이연응(李然應) 등은 사형되고 이재선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은 사건을 격렬한 척사상소운동을 잠재우는데 최대한 역이용하여, 유림의 거소항쟁(擧疏抗爭)에 타격을 가하고 흥선대원군의 재기를 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