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이삼동(李三同). 경상남도 진주 출신. 일본고등음악학교 본과(바이올린) 2학년을 수료하고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고향에서 휴양 중 태평(太平)레코드사에 관계하는 친구의 소개로 가요 작곡을 하게 되었다.
재래적인 한국 가요의 서정성과 서양음악(반주음악)을 접목하여 재치 있게 만들어냈고, 다작하는 정열을 과시하면서 유행가요를 많이 작곡했다. 1940년 「나그네 설움」으로 가수 백년설(白年雪)을 출세시켰으며, 이어 「불효자는 웁니다」 · 「꽃마차」를 신인가수 진방남(秦芳男)이 취입하여 인기가수가 되었다.
1941년 「복지만리」 · 「대지의 항구」를 백년설이 발표하여 당대 최고 인기가수로 각광을 받게 하였다. 이 곡들은 당시 우리 농민들을 만주로 내모는 목적영화의 주제가이기도 했다. 한편 「황하다방(黃河茶房)」 · 「갈매기 쌍쌍」 등으로는 백난아(白蘭兒)를 출세시켰다. 1943년 이후 전시체제하의 물자 결핍 현상으로 레코드 제작이 부진해지자, 태평레코드사의 전국 순회공연무대에서 연주단을 지휘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고향인 진주에서 중학교 음악교사로 봉직하였고, 1949년 이후 대구와 부산에서 「귀국선」 · 「아네모네 탄식」을 발표하였으며, 6 · 25전쟁 중 부산방송국(HLKB) 전속 악단장으로 취임하였다.
1954년 「홍콩 아가씨」(금사향 노래), 1955년 「경상도 아가씨」( 박재홍 노래) 등을 발표하였고, 그밖에 「무영탑 사랑」( 이인권 노래) · 「물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노래) · 「단장의 미아리고개」(이해연 노래) 등을 발표, 작품들의 완숙기에 이르렀다.
1956년 지병이 재발하여 마산요양원에서 휴양하면서 「산장의 여인」을 작곡하여 권혜경(權惠卿)에게, 「울어라 기타줄아」을 영화녹음기사였던 손인호(孫仁鎬)에게 취입시켰다.
그밖에 가곡으로 작곡했던 「고향에 찾아와도」를 발표하였고, 인기가수 남인수(南仁樹)에게 「무정열차」 · 「산유화」 등을 취입곡으로 주었다. 4 · 19혁명 직후 지병이 악화되어 미발표곡들을 남긴 채 죽었다.
이재호의 작품 중 월북작가 박영호 작사의 「막간아가씨」(1937년 발매)는 1975년 이후 유일한 작사자월북 사유로 금지곡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