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현지(玄之), 호는 판교(板橋). 이봉조(李鳳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신(李敬臣)이고, 아버지는 이진보(李鎭輔)이며, 어머니는 홍계만(洪啓萬)의 딸이다.
1768년(영조 44)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이 되어 언론 활동을 폈다. 1786년(정조 10) 의주부윤으로 외보(外補)되었으며, 3년 뒤 이조참의에 올랐다.
179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함양 등 여러 읍의 전임 수령들이 환곡을 횡령했음을 밝혀내 계문(啓文 :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올려 그 뒤 조정에서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고, 경상도 지역의 관둔전(官屯田)의 내수사 이속에 따른 폐단과 여러 읍에 설치된 민고(民庫)의 폐해 등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 때 일족인 이문원(李文源)이 황해도감사, 이시수(李時秀)가 함경감사로 재직 중이므로 연안 이씨 일문이 삼번(三潘)을 맡을 수 없다 하여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못하였다. 이듬 해에도 계속해 경상도 지역의 환곡부정사건이 조정에서 논란을 빚자, 오히려 그의 장계(狀啓)에 하자가 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다.
곧이어 이조참의로 재기용되었고, 한성부좌윤으로 재직중이던 1791년 동지부사로 연경에 다녀와 대사성을 역임한 뒤 대사헌에 올랐지만 곧 체직되었고, 도승지를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경상도관찰사 때 환곡 분배에 부정이 있다고 해 고신(告身 : 관직 임명 사령장)을 빼앗기고 삭직되었다.
1796년 예조판서로 서용되었고, 그 뒤 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공조판서로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의정부우참찬·형조판서·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순조 이후 노론의 시파로 활약하다가 1805년(순조 5) 김대비(金大妃: 영조 계비) 계인 김달순(金達淳)과 함께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김좌근(金左根)에 맞서다가 방귀전리(放歸田里: 유배보다 한 등급 가벼운 형. 벼슬을 삭탈하고 시골로 쫓아냄)당했고, 이듬 해 풀려나 죽었다. 죽은 뒤 직첩을 돌려받고 복관되었다. 글씨를 잘 써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