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무는 조선전기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된 공신이자 무신이다. 1360년(공민왕 9)에 태어나 1425년(세종 7)에 사망했다.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에 올랐다. 세종 즉위년에 왕명을 받아 전함 227척, 군졸 1만 7285명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했다. 불충한 자들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복권되었고, 사은사로 명에 다녀오면서 동행한 정희원의 불경한 행동을 아뢰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천에 유배되었다가 복관되었다.
본관은 장수(長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7년(태조 6) 옹진만호로 재직 중 왜구가 침입해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싸워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芳幹)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의주의 병마절제사를 거쳐, 1406년(태종 6) 좌군총제(左軍摠制)에 제수되었고 이어 우군총제를 겸했으며, 이 해장천군(長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08년 남양 · 수원 등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 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안주도병마사, 1411년 안주절제사를 거쳐, 이듬해 별시위좌이번절제사(別侍衛左二番節制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었다. 1417년 좌참찬 ·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 ·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이 해 왜선 50여 척이 비인현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해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절제사 이사검(李思儉)을 해주 · 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는 등 침입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의 허점을 틈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7285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벌군을 지휘해 대마도를 공략, 대소 선박 129척과 가호(家戶) 1,940여 호를 소각했으며, 적 114급(級)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귀국한 뒤 찬성사에 승진했으나, 불충한 김훈(金訓) · 노이(盧異)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상원(祥原)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복관되고, 1421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다음 해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행한 정희원(鄭希遠)의 불경한 행동을 직계하지 않아 1423년 과천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복관되었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