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석(錫). 호는 서우(西愚). 평안남도 성천 출신. 이용규(李龍奎)의 아들이며 이탁(李鐸)의 동생이다. 14세에 평양 청산학교(靑山學校)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911년 만주 유하현(柳河縣)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형이 군자금 모금차 성천에 오자 함께활동하다가 형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유하현 야저구(野猪溝)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3년 군자금 조달을 위해 성천에 돌아와 소유 농토를 방매처리하다가 잡혀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서울 기독교감리회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에 재학 중 형의 부름을 받고 1917년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이때 장차 무장독립운동에 대비하고자 중국 저장성[浙江省]에서 군사학을 전공하면서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18년 말 오적암살 및 군자금 모금차 만주로부터 국내로 잠입할 27인 결사대의 연락처를 설치하라는 밀령을 받고 귀국하였다. 경의선 숙천역 앞의 냉면집에 연락처를 마련하고 활동하다가 1919년 1월 성천서원에게 붙잡혔다.
1개월 뒤에 석방되어 다시 만주로 가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했다가 상해로 가서 구국모험단장(救國冒險團長) 김성근(金聲根)의 요청으로 이 단체의 간부가 되어 동지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치면서 폭탄 제조에 주력하였다.
1920년 4월 미국 국회의원단 내한 때 광복군사령부 결사대가 사용할 고성능 폭탄을 제조하라는 형의 지령을 받고 폭탄을 제조하기 위해 공동조계에서 탄피를 구입하려다가 일본영사관 밀정의 밀고로 영국경찰에 붙잡혀 일제에 인도되었다.
평양으로 압송되어 6월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도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