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천미(天微). 영의정 이윤경(李潤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예열(李禮悅)이고, 아버지는 예빈시정 이사수(李士修)이며, 어머니는 종친부첨정 김선(金銑)의 딸이다.
1623년(인조 1)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고 1626년 승문원정자를 거쳐 저작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까지 호가했고, 곧 박사가 되었다가 환도한 뒤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여주로 돌아갔다.
1628년 다시 박사를 제수받은 뒤 전적을 거쳐 감찰이 되었고, 이어 예조·병조·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32년 경성판윤(鏡城判尹)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호조·형조좌랑을 역임하고 다시 보성군수로 나가 곧 병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경상도사에 제수되었다.
1635년 대동찰방(大同察訪)·형조정랑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통례원상례가 되었으나 3개월만에 병으로 체직되어 여주에 우거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음을 듣고 호가를 위해 곧 갔으나 도중에 청병(淸兵)을 만나 좌절되고, 지평에서 의병을 모은 전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함께 춘천·양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637년 이후 장령·예조정랑·군기시정·봉상시정 등과 네 번의 사간의 임명, 두 번의 홍문관응교의 제수, 승문원판교·사복시정·집의 등의 임명에 모두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여주에서 머물다가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가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만 일시 출사했다가 곧 향리로 돌아갔고, 광해군 때의 폐모사건 이후 출사하지 않은 영남의 김령(金坽), 호남의 신천익(愼天翊)과 더불어 처음부터 벼슬에 뜻이 없었다고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