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장(子章), 호는 탄옹(灘翁) 혹은 월탄(月灘). 이경종(李慶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주(李澍)이고, 아버지는 판서 이광정(李光庭)이며, 어머니는 심순(沈筍)의 딸이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사위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시에 합격, 음보로 사과가 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1612년 장인인 유영경이 대북파에 의해 추죄(追罪: 사후에 죄를 추궁해 처벌함.)될 때 삭직되어 10여 년간 파산 · 금양 · 노량 등지에서 우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성균관전적으로 다시 서용되었고 이어 호조 · 병조 · 형조의 좌랑을 지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아버지 광정과 함께 천안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인조를 호가해 서울로 돌아온 뒤 예조정랑에 올랐으며, 곧 영평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1625년(인조 3)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직강 · 태복첨정을 거쳐 예빈시정으로 승진했고, 정언 · 장령 · 문학을 두루 지낸 뒤 아버지가 병이 들자 사직하였다. 1629년 다시 정언을 제수받았으며, 1634년 순천부사로 나가 백성을 잘 다스려 가자되고, 이어 공청도양전사(公淸道量田使)가 되었다.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636년 양서관향사(兩西管餉使)로 공을 세워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곧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글씨로 당대에 이름이 높아 1630년 『목릉지(穆陵誌)』를 썼고 2년 후에는 국장도감(國葬都監) 서사관(書寫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