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호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북로군정서, 간도연변자치촉진회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육군 대령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군인 · 독립운동가.
이칭
철주(鐵舟)
이칭
성룡(盛龍)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6년(고종 33)
사망 연도
1950년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
관련 사건
청산리전투|6·25전쟁
정의
일제강점기 때, 북로군정서, 간도연변자치촉진회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육군 대령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군인 ·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성룡(盛龍). 호는 철주(鐵舟). 함경북도 경성 출신. 전재일(全在一)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0년 조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만주로 건너가서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입단한 뒤 귀국하였고, 3·1운동 때는 용정(龍井)의 은행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사관연수소를 졸업하고 교관이 되었다.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때 편의대(便衣隊)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애를 써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을 세웠다. 1927년에는 김좌진(金佐鎭)·지청천(池靑天) 등과 한국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에는 간도연변자치촉진회(間島沿邊自治促進會)의 부회장으로 있다가 일본 헌병대에 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청진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5년 중국의용군 총사령 왕덕림(王德林)과 독립운동에 관해 회담하였고, 계속 지청천부대와의 지하 연락을 담당하였다. 전성호는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론을 창도하고 투쟁심을 고취할 수 있는 신문 발간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3·1운동 직후 등사판으로 간도지방에서 찍어내는 『대한독립신문』·『우리의 편지』·『조선독립신문』 등 지하신문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 뒤 『간도일보(間島日報)』가 합법적으로 발간되자 이에 접근하여 민족독립운동을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해 귀국한 후 초창기의 국군에 입대하여 6·25전쟁 때는 육군 대령으로 영덕상륙작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4·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1973)
『한국독립운동사』5(국사편찬위원회, 1969)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전성호평전」(『자유민에게 전해다오』1, 국방부, 1955)
집필자
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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