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교육과 의학취재(醫學取才: 의학실력을 시험하여 사람을 뽑음) 등의 사무도 겸하여 관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태의감(太醫監)·사의서(司醫署)·전의시(典醫寺) 등으로 명칭이 변화되어오다가 조선 건국 초 관제개혁에 의하여 전의감으로 개칭되었다. 서울 중부 견평방(堅平坊: 지금의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하였다.
전의감은 의료행정 및 의학교육의 중추기관으로서 왕실과 조관(朝官)들의 진시(診視: 진찰)와 화제(和劑: 약의 조제) 및 약재의 종식(種植: 약재를 키움), 의학취재 등의 일을 겸하였다.
조선 초기의 관원은 판사·감(監)·소감·승(丞)·주부·겸주부·직장·박사를 각 2인, 검약(檢藥) 4인, 조교 2인을 두었다. 그 뒤 몇 차례의 관제개혁을 거쳐 1466년(세조 12)의 개혁 때에는 검약을 부봉사로, 조교를 참봉으로 고치고 겸정(兼正)·직장을 각각 1인씩 없애고, 판관 1인을 증원했다.
『경국대전』에는 정(正)·부정·첨정·판관·주부 각 1인, 의학교수·직장·봉사 각 2인, 부봉사·의학훈도 각 1인, 참봉 5인으로 관원을 정하여 인원을 축소하였다. 『속대전』에 의하면 부정을 없애고 의학교수, 봉사는 각 1인씩, 부봉사는 2인, 참봉은 3인을 감원하여 그 기구를 축소하였다.
그러나 1867년(고종 4)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치종교수(治腫敎授) 1인, 침의 3인, 부사과 1인을 증원하였다. 그리고 이례(吏隷)로서 서원(書員)·고직(庫直)·대고직 각 1인, 사령 5인, 구종(驅從: 관리의 하인)·군사 각 2인을 두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의감에는 제조 2인을 두고, 취재(取才) 때는 분수(分數)가 많은 사람을 뽑았다. 판관 한 사람은 구임(久任)으로 하고, 구임과 교수, 훈도를 제외한 관원은 체아직(遞兒職: 현직을 떠난 문무관에게 특별한 경우에 주는 벼슬)으로 1년에 두 차례 도목(都目: 관리의 공과를 평정하여 승진 또는 출척시키는 인사행정)한다. 취재시에 차점자는 외임(外任)으로 차출하고, 주부 이상의 관원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으로 임명하며,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은 세조 때 15인에서 30인으로 증원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하여 전의감은 태의원(太醫院)으로 개칭되었으며, 서양의술이 보급되면서 그 역할이 감소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