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용(鄭神勇)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1010년(현종 1) 거란(契丹)의 제2차 침입 이후 거란은 고려 현종(顯宗)의 주1를 요구하였다. 현종의 친조는 거란에 항복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었다. 고려의 계속된 친조 거부로 거란 성종(聖宗)은 흥화진(興化鎭)·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구주(龜州) 등 강동6주(江東六州)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고려가 이에 불응하자 1014년(현종 5) 다시 고려를 침입하였는데, 이는 1010년 거란의 제2차 침입 이후부터 1018년(현종 9) 거란 소배압(蕭排押)의 제3차 침입 이전에 있었던 결코 작지 않은 전쟁이었다.
1014년 10월 거란의 상온(祥穩)과 소적렬(蕭敵烈)이 통주에 침입하자, 흥화진의 장군으로서 별장(別將) 주연(周演)과 함께 이를 격퇴시키고 700여 급의 목을 베었다. 이듬해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정신용이 변방을 지킨 공(功)이 있으므로, 관급(官級)을 높여 포상해 주어야 한다는 주청에 따라 가급(加級)되었다.
이듬해인 1015년(현종 6) 9월에 거란군은 통주의 침입을 시작으로 흥화진·용주·영주(寧州: 현, 평안북도 안주군) 등을 차례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통주를 비롯한 흥화진·용주·영주 등은 모두 거란의 침입을 격퇴시켰다. 그 당시 거란군이 통주와 흥화진에 침입하자, 정신용은 대장군(大將軍)으로서 별장 주연,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校尉) 양춘(楊春), 태의승(大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穎) 등과 함께 거란군의 후미를 쳐서 700여 명을 죽이는 큰 공을 세웠으나 이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1016년(현종 7)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상주국(上柱國)에 추증되고, 아들 정균백(鄭均伯)은 낭장(郎將) 겸 상승봉어(尙乘奉御)에 임명되었다. 이해 11월에 주2 20결(結), 1020년(현종 11)에는 곡(穀) 300석을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