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관직과 관인을 대상으로 품계를 설정하여 구분하고 있었는데, 각각 본관품(本官品), 산관품(散官品)이라 한다. 하지만 관계(官階)나 산계처럼 관인의 지위를 구분하는 산관품은 고려 전기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고, 관직의 품계가 관인의 지위를 드러내는 역할까지도 하였다. 산관품으로는 고려 초기의 관계에 정2품은 없고 그냥 2품계로 대광(大匡)과 정광(正匡)이 있었다. 그러다가 산계 중 문산계는 성종(成宗) 대의 관제 정비보다 빠른 광종(光宗) 대에 공복(公服) 제정 등과 관련하여 이미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문산계라는 정의에는 맞지 않게 고려 후기까지 산계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문산계와 무산계는 성종과 문종(文宗) 대에 크게 정비되어 있다. 995년(성종 14)과 1076년(문종 30)의 문산계에서 정2품은 특진(特進)이고, 문종 대의 무산계 정2품은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이다. 또 문종 대 관제를 기준으로 정2품 관직으로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평장사(平章事)와 상서성(尙書省)의 좌우복야(左右僕射)가 해당된다.
고려 후기 1275년(충렬왕 1)에 원(元)나라의 요구에 따라 관제가 격하, 개편되었다. 평장사는 첨의부(僉議府)의 찬성사(贊成事)로 개칭되었지만 품계는 변하지 않았다. 좌복야와 우복야는 상서성의 폐지와 함께 없어졌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의 관제 개편에서는 문산계가 흥록대부(興祿大夫)로 고쳐지고 찬성사가 혁파되는 대신 좌우복야가 첨의부의 관직으로 복치되었다. 이 밖에 동지광정원사(同知光政院事)와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 및 종실제군(宗室諸君)의 관직으로서 원윤(元尹)이 정2품 관직으로 신설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충선왕이 퇴위하면서 찬성사가 복치되고, 좌우복야와 동지광정원사 · 동지자정원사는 없어졌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복위하면서 문산계가 광정대부(匡靖大夫)로 고쳐지고, 찬성사는 중호(中護)로 개칭되었다.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이 정2품 관직으로 승격되었다. 1310년(충선왕 2) 문산계가 개정되어 대광과 정광을 상하로 하는 쌍계(雙階)가 갖추어졌다. 뒤에 중호가 찬성사로, 대사헌이 감찰대부(監察大夫)로 개칭되었으나 품계에는 변화가 없었다. 1356년(공민왕 5)의 관제 개혁에서는 문산계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와 은청영록대부(銀靑榮祿大夫)로 개편되었다. 찬성사 · 감찰대부는 평장사 · 어사대부(御史大夫)로 각각 개칭되고, 좌우복야가 복치되어 모두 정2품 관직으로 되었다. 그러나 종실제군의 원윤은 혁파되었고, 얼마 뒤 내시부(內侍府)의 직제가 갖추어지면서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정2품 관직으로 설치되었다. 1362년(공민왕 11) 문산계가 단계(單階)의 광정대부로 개정되는 한편, 찬성사 · 어사대부가 각각 평장사 · 감찰대부로 개칭되고, 종실제군의 원윤이 복치되었다. 좌우복야가 혁파되는 대신 삼사(三司)의 좌우사(左右使)가 정2품 관직으로 승격되었다. 1369년(공민왕 18) 광록대부(光祿大夫)와 숭록대부(崇祿大夫)가 상하 쌍계의 문산계로 되고, 감찰대부가 대사헌으로 개칭되어 찬성사 · 삼사좌우사(三司左右史) · 판내시부사 · 원윤 등과 함께 정2품 관직을 구성하였다. 1372년(공민왕 21) 문산계가 다시 개정되어 정2품 상위를 대광, 하위를 광정대부라 하였다. 우왕 때 내시부가 폐지됨에 따라 판내시부사는 혁파되었다.
산계나 관직 외에 훈과 작에도 정2품이 존재하는데, 문종 대의 정2품 훈직이 상주국(上柱國)이며, 작은 국공(國公)이 식읍(食邑) 3천호와 함께 정2품으로 정해졌다. 훈작(勳爵)은 모두 충렬왕(忠烈王) 때에 폐지되었다가 작의 경우 공민왕(恭愍王) 때에 복구와 폐지를 반복하였다.
관품은 고려 전기에 관인과 관직을 구분하고 비슷한 지위의 관인과 관직을 연결시키기 위해 도입한 제도의 등급이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에 당과 달리 산계와 관직 사이의 관품이 일정하게 조응하지 않아 사실상 산계가 제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중국의 관품을 적용하여 운영하는 과정에서 고려만의 운영 방식을 마련하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