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구는 광복 이후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린 도시빈민운동가로 천주교인이다. 1972년 봄 청계천 할빈교회의 김진홍을 만나 배달학당의 야학 선생을 맡으면서 판자촌 생활에 큰 충격을 받아 빈민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던 중에 천주교에 깊이 몰입, 평생을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1984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주민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목동 판자촌 강제철거 저지투쟁을 벌였다. 제정구는 일생을 도시빈민의 생존권·인권 보호 운동을 전개해 ‘빈민의 벗’,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렸다.
경상남도 고성 출생. 1972년부터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서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해 일생을 도시빈민의 생존권 · 인권 보호운동을 전개하여 ‘빈민의 벗’,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렸다.
1962년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67년에 군에 입대하여 만기 제대한 후, 1971년에 복학했으나 곧바로 교련 반대 시위로 제적당하였다.
1972년 봄 청계천 할빈교회의 김진홍 목사(당시 전도사)를 만나 ‘산 자가 올 수 있는 가장 막다른 골목’인 청계천 판자촌에서 배달학당의 야학(夜學) 선생을 맡으면서 판자촌 생활에 큰 충격을 받아, “판자촌을 나 몰라라 하며 진리 · 정의 · 민주주의를 외친다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판자촌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오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빈민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73년 12월, 평생의 지기요 동지인 예수회 소속 미국인 신부 정일우를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첫째, 프로젝트를 하지 않는다. 둘째, 그냥 산다. 셋째,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를 필요로 할 때마다 앞장선다. 넷째, 그들 스스로 하는 일에 함께 하고 거든다”는 빈민운동의 약속을 정하였다.
1974년 4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가담하여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고, 1973년 복한한 학교에서도 다시 제적당하였다(1980년 졸업; 1983 서강대 대학원 신학과 석사과정 수료). 감옥생활 동안 천주교에 깊이 몰입하게 되었고, 이후 평생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또한 구도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1975년 2월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였다.
출소 후 청계촌 판자촌이 강제철거 당하자 다시 양평동 판자촌으로 옮겨 활동했으나 이 또한 강제철거 당하자 1977년 정일우 신부와 함께 양천동 철거민들을 데리고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신천리로 이주하여 빈민공동체인 ‘복음자리 마을’을 건설하였다. 뒤이어 1979년 시흥동 등의 철거민들과 함께 ‘한독마을’을 지었다. 신 · 구교 공동기구였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도시주민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4년 사면복권을 받았으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주민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여타의 민중운동가들과 함께 목동 판자촌 강제철거 저지투쟁을 벌였다. 이 때부터 ‘도시빈민운동’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되게 되었고, 그에게는 ‘빈민운동의 대부’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1984년 빈민운동의 대표자격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중앙위원으로 민주화투쟁에 참여했다. 1985년 3월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뒤에 천주교도시빈민회로 개칭)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으로, 그리고 11월에는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1986년 2월 정일우 신부와 함께 필리핀 정부가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 지역사회지도 부문을 수상하였다. 1987년 판자촌 강제철거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공동대표를 맡아 6·10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권의 야당이 분열하여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하자 1988년 재야운동권을 중심으로 ‘한겨레민주당’을 창당, 공동대표에 취임하였으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1988년 태국 방콕에서 발족한 ‘민중주거쟁취 아시아연합(Asian Coalition for Housing Rights)’에 정일우 신부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1989년 ‘아시아 도시빈민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1991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의 사무총장을 맡았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의 공천(경기도 시흥 · 군포 선거구)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통합민주당)에서 재선되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통합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으로 한라당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민주당 사무총장, 원내총무, 부총재 등을 맡기도 했으나, ‘민주개혁정치모임’ 등의 정치개혁운동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생을 빈민운동에 헌신한 그를 두고 한국천주교회의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메마른 땅의 한줌의 소금’과 같은 인생이라고 칭송하였고, 절친한 친구이자 지기였던 김영일(옛 이름 김지하) 시인은 “그는 참된 구도자였다. 동시에 그는 참된 혁명가였다”고 추모하였다.
1999년 폐암으로 사망한 뒤 민주화와 도시빈민을 위해 투쟁해 온 공적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