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패주(浿州)이다. 1636년(인조 14)에 태어나 평양지역에서 화가로 성장하며 활동하였고, 중년 이후에 상경(上京)하여 어진(御眞) 제작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도사(圖寫)활동을 펼쳤다. 졸년은 미상이지만, 70세인 1705년(숙종 31)까지 작품을 남긴 것으로 확인된다.
평양에 기반을 둔 조세걸의 집안은 선대부터 중․ 하위 관직을 역임한 양반가였으며, 부친 조흥종(曺興宗)은 시서(詩書)에 능하여 조세걸의 그림(畵)과 함께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을 이루어 부자(父子)가 ‘조씨삼절(曺氏三絶)’로 불릴 만큼 평양에서 유명하였다. 집이 부유하여 많은 중국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고 이는 조세걸 화풍 형성에 밑거름이 되었다. 조세걸은 40대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였으며, 태조영정모사(1688년)와 숙종어진도사(1695년) 등 두 차례의 어진 제작에 참여하여, 충익장(忠翊將, 1690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699년)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조세걸은 산수화에도 능했는데,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김수증의 산거지(山居地)를 그린 『곡운구곡도첩(谷雲九曲圖帖)』(1682년, 국립춘천박물관)은 조세걸이 실제 경치를 보고 사생하여 그린 실경산수화로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화면 구성과 묘법이 중국에서 전래된 화보(畵譜) 혹은 오파 화풍(吳派畵風 : 중국 명대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 지방에서 활약한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인화 일파의 화풍)의 산수화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목된다. 특히 비수(肥瘦)의 차가 거의 없는 가는 윤곽선은 절파(浙派)의 필선과는 다른 새로운 화풍의 수용을 말해 준다. 이 외에 「계산풍우도」(국립중앙박물관), 「산수인물도」경남대학박물관)는 절파 화풍(浙派畵風 : 중국 명대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출신의 대진(戴進)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직업화가 일파의 화풍)의 작품으로 조세걸이 조선중기 이래의 절파 화풍에 능하면서 중국에서 새로이 전래되기 시작한 오파 화풍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