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직산(稷山). 자는 옥첨(玉瞻). 장성 출신.
무과를 거쳐 환로에 나아가 용천부사를 역임하고 양산군수가 되었다. 양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의 선봉이 부산·동래성을 공격하자 경상우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쳤으나, 조영규는 오히려 말을 달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찾아가 생사를 같이하기로 기약하였다.
당시 조영규의 노모가 임소인 양산에 있었으므로 다시 양산으로 돌아와 노모와 작별하고 동래성으로 갔다. 이미 왜병이 동래성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단기(單騎)로 돌진하여 적진을 통과, 성내로 들어가 왜병과 끝까지 싸웠다. 성이 함락당하자 송상현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1669년(현종 10) 송준길(宋浚吉)의 상계로 조영규의 효행과 충절이 알려져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동래의 안락서원(安樂書院), 양산의 충렬사(忠烈祠), 장성의 모암서원(慕巖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