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여심(餘心) 또는 여심생(餘心生). 평양 출신. 목사 주공삼(朱孔三)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시인 주요한(朱耀翰)의 아우이다.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평양의 숭덕소학교를 거쳐 1918년 숭실중학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지하신문을 발간하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10개월의 형을 받았다.
1920년 중국으로 가 쑤저우[蘇州] 안세이중학[安晟中學]을 거쳐 1921년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부속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27년에는 후장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1928년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포드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을 전공한 뒤 1929년 귀국하였다. 193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동아(新東亞)』의 주간으로 일하다가 1934년 중국의 베이징 푸렌대학[輔仁大學] 교수로 취임하였다.
1943년 일본의 대륙 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추방령을 받아 귀국하였다. 1946년부터 1953년 사이에 상호출판사(相互出版社) 주간과 『코리아타임스』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1953년부터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1954년부터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1961년 코리안리퍼블릭 이사장, 1968년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1959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제30차 세계작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1963년 미국의 미주리대학 등 6개 대학에서 ‘아시아 문화 및 문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21년 4월『개벽(開闢)』 제10호에 단편소설 「추운 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여대생과 밍크코우트」(1970)에 이르기까지 40편 가량의 단편소설을 비롯하여 「구름을 잡으려고」(1923)와 「길」(1938) 등 4편의 장편소설과 「첫사랑」(1925)과 「미완성(未完成)」(1936) 등 2편의 중편소설을 남겼다. 「김유신(Kim Yu Shin)」(1947과 「The Frost of the White Rock」(1963) 등의 영문 소설도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대략 4단계의 변모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첫째는 「추운 밤」부터 「인력거군(人力車軍)」(1925)·「살인(殺人)」(1925)·「개밥」(1927) 등이 쓰여진 1921년부터 1927년까지의 시기로 주로 극빈한 사람들의 생활과 갈등을 동정하는 시선과 인도주의적 자세로 그려보였다. 이것은 이른바 신경향파로 지목되는 당대의 유행적 경향과도 일치한다.
둘째는 「할머니」(1930)에서 「사랑손님과 어머니」(1935)·「아네모네의 마담」(1936)·「추물(醜物)」(1936)·「봉천역식당(奉天驛食堂)」(1937)·「왜 왔던고」(1937)에 이르는 시기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이 때이다. 그의 대표작 및 성숙한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며 기성 윤리나 외모 또는 배신으로 인한 사랑의 좌절이나 향수 등을 그려 삶의 의미를 추구하였다.
셋째는 1946년부터 1958년까지의 시기로 「입을 열어 말하라」(1946)·「대학교수(大學敎授)와 모리배(謀利輩)」(1948)·「해방일주년(解放一周年)」(1948)·「이십오년」(1950) 등을 통하여 광복 후의 무질서와 혼란을 고발하고 비판하면서 사회의식을 각성하고 자아의 자각을 탐색하여나갔다.
넷째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의 시기로 「세 죽음」(1965)·「열 줌의 흙」(1967)·「죽고 싶어하는 여인」(1968)·「여대생과 밍크코우트」 등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다운 삶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변모 과정은 근대적 리얼리즘의 일반적인 성격이 한국 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태도와 기법으로 나타나게 되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