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강후시는 의주 북단 중강 일대에서 중국의 산서 상인 등과 조선의 만상, 송상, 경상 등이 비공식적으로 교역하던 사무역 시장을 일컫는 말이다. 1593년(선조 26)에 전란과 기근에 따른 식량난과 군수 물자 마련을 위해 유성룡이 명에 요청하여 중강개시가 열린 이후 양국 상인들이 관의 감독을 피해 더 큰 무역 효과를 누리고자 자발적으로 개설한 대외 무역 시장이다. 1660년(현종 1)가 봉황성의 책문에서 사행단에 합류한 사상층이 후시무역을 열자 점차 교역량이 감소하였고 1700년(숙종 26) 중강개시가 폐지되면서 교역이 중단되었다.
중강후시는 의주 북단 중강 일대에서 중국 상인과 조선 상인들이 사적으로 교역하던 대외 무역 시장을 일컫는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柳成龍)이 건의하여, 요동 지방으로부터 식량과 마필을 조달하기 위하여 개시 무역(開市貿易)이 시작되었으나, 밀무역 성행, 국가 기밀 누설, 후금의 성장으로 인한 군사적 위기를 이유로 1613년(광해군 5) 폐지되었다.
명청 교체 후 청의 요구로 1646년(인조 24)에 중강개시가 재개되었고, 이후 1700년(숙종 26) 폐지되기 전까지 양국 상인들의 교역의 장으로 활발히 운영되었다. 그러나 중강개시는 의주부윤의 감독 하에 교역 절차를 따라야 했으며, 암말[牡馬]/牡馬은 '수말'을 뜻하므로 내용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슈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과 인삼의 교역은 일체 엄금하였고, 사무역도 금지했기 때문에 무역 효과가 크지 않았다. 이에 중강개시가 열리던 곳에서 정부의 허가 없이 비공식적, 불법적인 형태로 열리던 사무역이 행해졌는데, 이를 '중강후시(中江後市)'라 한다.
개시 무역의 금령이 해이해지는 틈을 타 조선의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 상인들과 서울 상인 일부가 참여해 중국 산서 상인 등과 교역하였다. 또 개시 무역이 연 2회 날짜를 정해 정기적으로 열렸던 데 반해, 후시무역은 사행(使行)이 있을 때마다 이루어져 전체적인 교역량은 공무역을 능가하였다. 교역 물품 역시 개시 무역에서 거래한 물품뿐만 아니라 교역이 금지된 물품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의주 일대 대외 무역은 '중강후시'의 이름으로 50여 년간 크게 성행하였다.
후시 무역의 성장은 17세기 후반 대외 정세가 안정되고 중국, 일본과의 무역이 재개되면서 국가 간 무역 수요가 증대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관권의 통제와 개입이 배제된 후시 무역은 국내 사상층이 외국 상인들과 직접 교역해 각국의 상품의 유행과 수출을 유도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조선 후기 만상, 송상과 같은 대규모 자본력을 가진 사상층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후시 무역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1660년(현종 1)부터 요동의 책문(柵門) 밖에서 후시 무역이 행해지자, 사행단의 마부 혹은 짐꾼을 가장해 무역에 참여하는 상인들이 늘어나면서 중강후시의 교역량은 점차 줄어들었다.
1700년(숙종 26) 중강개시에 조선 상인이 나오지 않아 교역이 이루어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청에 의해 중강후시 문제가 불거지자 조선은 청에 자문을 보내 중강후시를 중단하기로 했다.
최근, 중강후시의 폐지 시기를 『만기요람』에 기재된 1700년이 아닌, 『동문휘고』에 의거해 1701년(숙종 27)으로 수정한 연구가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