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교는 일제강점기에 100개에 가까운 교파와 수백 만의 신도를 헤아릴 정도로 크게 일어났다. 그렇지만,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 〈유사종교해산령〉을 내리자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1945년의 8·15광복과 함께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증산교는 각 교파별로 교단을 정비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민족종교로서의 성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각 교파간에는 신앙체계와 교리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증산교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이에 교단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각 교파의 지도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8·15광복 후에는 미군정청의 통위부장을 지낸 유동열(柳東悅)을 중심으로 증산교단의 통합조직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1949년 1월 11일 증산교의 17개 교단 대표들은 서울에 모여 증산교단통정원을 조직하고, 증산교단선언과 교의체계·신앙체계·증산교규약을 채택·선포하였다. 그 뒤, 임원을 선출하고 총본부를 서울에 있는 시천교(侍天敎)의 본부에 두기로 하였다.
이 단체는 그 첫 사업으로 순회단을 조직하여 전국 각 지방을 돌면서 민족신앙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그러나 순회강연 도중 발생한 김구(金九) 암살사건과 정치적 불안으로 중지되었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대표자인 유동열이 납북됨에 따라 증산교단통정원은 와해되고 말았다.
이 단체에서 행한 순회강연의 내용 가운데 이정립(李正立)의 강연내용은 후일 『민족적 종교운동』이라는 책으로 발행되었다.
그 내용은 증산교사상의 하나인 원시반본(原始返本)에 따라 우리 겨레 본연의 생존이념에 입각한 종교운동을 펼쳐야만 외래사상의 노예가 된 겨레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