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는 1888년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업하였다. 26세 때 만주와 북경 등지를 유전(流轉)하다가 28세 때 태을교(太乙敎, 또는 仙道敎:뒤의 普天敎)에 들어갔다.
1919년 보천교의 조직이 방주제로 개편될 때 중앙 최고 8교령(敎領)의 한 명으로 임명되었으며, 보천교경성진정원장(普天敎京成眞正院長)과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의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1924년 차경석(車京石)으로부터 교직을 파면당하자 동료 간부였던 이종익(李鍾翊) · 이정립(李正立) 등과 함께 서울에서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경석이 점점 친일적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탈퇴하였다. 1928년 그는 임경호(林警鎬) · 이정립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이름으로 별도 종교를 창립하였다.
그 뒤, 이상호는 증산산교의 창교자 강일순(姜一淳:호는 甑山)의 행적과 언행을 수집하여 1929년에는 ≪증산천사공사기 甑山天師公事記≫, 1929년에는 ≪대순전경 大巡典經≫이라는 증산교단 최초의 경전들을 간행하였다.
1931년 동화교는 고판례(高判禮)의 선도교(仙道敎)와 통합하여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36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증산계 모든 종단의 해산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해체되고 말았다.
1945년 이상호는 서울에서 최위석(崔偉錫) · 이정립과 함께 많은 신도들을 모아 대법사(大法社)를 조직, 증산사상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948년 13개 증산교단이 모여 연합체를 조직할 때 교명을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라 고쳤다가, 1961년 민족종교단체 통합정책에 따라 동도교증산교회(東道敎甑山敎會)로 바꾸고, 1968년에 다시 증산교본부로 바꾸었다. 1967년 이상호가 사망하자, 그의 친동생이며 창립 초기부터 같이 교단을 이끌어왔던 이정립이 대를 이어 교주가 되었으나, 그 역시 1968년에 사망하였다.
그 뒤부터는 보정회의(保正會議)에서 최고대표인 종령(宗領)을 선출하고 있다. 전국에 42개 교당조직과 약 1만 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이 교단은 증산교의 기본경전인 ≪대순전경≫의 편찬, 간행과 증산사상을 체계화시켜 정립한 ≪대순철학 大巡哲學≫을 펴냄으로써 증산사상의 보급과 발전에 크게 기여해오고 있다.
신앙의 대상은 증산이며, 증산은 삼계(三界)를 주재하는 통천상제(統天上帝) <하누님>이 강림한 것으로 본다.
증산사상으로 국민도덕 건설, 민족주체성 확립, 민족문화 건설을 이룩하자는 강령과,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5계잠(五戒箴)을 두고 있다. 연 6차례의 정례치성을 갖는다.
주요 출판물로는 ≪대순전경≫ · ≪대순철학≫ · ≪증산천사공사기 甑山天師公事記≫ · ≪고부인신정기 高夫人神政記≫ · ≪증산교개설 甑山敎槪說≫ · ≪증산교사 甑山敎史≫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