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교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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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교
단체
1928년 이상호(李祥昊, 1888∼1967)가 창시한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
이칭
이칭
대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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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8년 이상호(李祥昊, 1888∼1967)가 창시한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
연원 및 변천

이상호는 1888년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업하였다. 26세 때 만주와 북경 등지를 유전(流轉)하다가 28세 때 태을교(太乙敎, 또는 仙道敎:뒤의 普天敎)에 들어갔다.

1919년 보천교의 조직이 방주제로 개편될 때 중앙 최고 8교령(敎領)의 한 명으로 임명되었으며, 보천교경성진정원장(普天敎京成眞正院長)과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의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1924년 차경석(車京石)으로부터 교직을 파면당하자 동료 간부였던 이종익(李鍾翊)·이정립(李正立) 등과 함께 서울에서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경석이 점점 친일적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탈퇴하였다. 1928년 그는 임경호(林警鎬)·이정립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이름으로 별도 종교를 창립하였다.

그 뒤, 이상호는 증산산교의 창교자 강일순(姜一淳:호는 甑山)의 행적과 언행을 수집하여 1929년에는 ≪증산천사공사기 甑山天師公事記≫, 1929년에는 ≪대순전경 大巡典經≫이라는 증산교단 최초의 경전들을 간행하였다.

1931년 동화교는 고판례(高判禮)의 선도교(仙道敎)와 통합하여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36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증산계 모든 종단의 해산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해체되고 말았다.

1945년 이상호는 서울에서 최위석(崔偉錫)·이정립과 함께 많은 신도들을 모아 대법사(大法社)를 조직, 증산사상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948년 13개 증산교단이 모여 연합체를 조직할 때 교명을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라 고쳤다가, 1961년 민족종교단체 통합정책에 따라 동도교증산교회(東道敎甑山敎會)로 바꾸고, 1968년에 다시 증산교본부로 바꾸었다. 1967년 이상호가 사망하자, 그의 친동생이며 창립 초기부터 같이 교단을 이끌어왔던 이정립이 대를 이어 교주가 되었으나, 그 역시 1968년에 사망하였다.

그 뒤부터는 보정회의(保正會議)에서 최고대표인 종령(宗領)을 선출하고 있다. 전국에 42개 교당조직과 약 1만 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이 교단은 증산교의 기본경전인 ≪대순전경≫의 편찬, 간행과 증산사상을 체계화시켜 정립한 ≪대순철학 大巡哲學≫을 펴냄으로써 증산사상의 보급과 발전에 크게 기여해오고 있다.

신앙의 대상은 증산이며, 증산은 삼계(三界)를 주재하는 통천상제(統天上帝) <하누님>이 강림한 것으로 본다.

증산사상으로 국민도덕 건설, 민족주체성 확립, 민족문화 건설을 이룩하자는 강령과,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5계잠(五戒箴)을 두고 있다. 연 6차례의 정례치성을 갖는다.

주요 출판물로는 ≪대순전경≫·≪대순철학≫·≪증산천사공사기 甑山天師公事記≫·≪고부인신정기 高夫人神政記≫·≪증산교개설 甑山敎槪說≫·≪증산교사 甑山敎史≫ 등이 있다.

참고문헌

『증산교사』(이정립, 증산교본부, 1977)
『증산교개설』(홍범초, 창문각, 1982)
『증산교요령』6판(이정립, 증산교본부, 1990)
『한국신흥종교총감』(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한국민족종교총람』(사단법인 한국민족종교협의회, 1992)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유병덕·양은용,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집필자
노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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