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고원군 출신인 배용덕은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징용병으로 끌려가 노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는 1946년 3월부터 1948년 8월까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조직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6·25 피난시절에는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남중동 서부피난민 자치회장을 지냈고, 1962년 7월부터 1966년 3월까지는 한국종교사상연구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69년에는 증산교단연합운동 교리연구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71년증산신도친목회가 결성될 때에는 부회장을, 1972년에는 증산교단통일회 부회장을, 그리고 1974년에 결성된 증산교단연합회에서도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04년 청운도사(靑雲道士)에게서 증산도를 전수받은 부친 배운경(裵雲卿)으로부터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姜一淳 : 호는 甑山)의 탄강(誕降) 1백년이 되는 해에 학자들에게 도를 펴라”는 당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유지에 따라 1973년에 증산진법회라는 종단을 창립하였으며, 1974년에는 증산사상연구회를 창립하였다. 그는 종단 활동보다는 증산사상의 학문적 체계화에 주력하였다.
그는 1974년 1월 증산사상연구간담회를 개최한 이래, 총 40회에 걸쳐 증산사상에 관한 세미나와 학술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1975년부터는 매년 『증산사상연구』라는 학술논문집을 간행하였다. 이 논문집은 1995년 특집으로 출판된 배용덕과 황정용(黃正容) 공저의 『증산사상중심의 인류갱생철학개론』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배용덕은 『증산이념과 천지공사』 · 『증산이념과 여성관』 · 『하느님의 강세와 천지공사』 · 『한민족과 천지공사』 · 『증산신학개론』 등 여러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는 학자들과는 활발한 교류를 가졌지만, 교세 확장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따라서 증산집법회의 신도는 비교적 지식층으로 구성되었지만, 수백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1998년 그가 사망한 후, 증산진법회와 증산사상연구회는 1999년 홍범초 등에 의해 재건되었다가 현재는 중단되었다.
증산진법회의 신조(信條)는 ① 증산을 유일신으로 믿고, ② 증산이 새 이법(理法)으로 제세구민(濟世救民)함을 믿고, ③ 증산이 삼계(三界)를 낙토화하였음을 믿고, ④ 다가올 선경세계의 시민이 될 것을 믿는다는 것 등이다.
강령(綱領)은 성경신(誠敬信)으로 ① 증산상제(甑山上帝)의 진법(眞法)을 탐구, 구현, 실현하고, ② 우리의 민족종교를 확립하고 나아가 세계종교통일을 추진하며, ③ 상천법지(象天法地) 광제천하(廣濟天下) · 대전협동(大全協同)의 성업(聖業)을 달성한다는 세 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