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기(豊基). 자는 정백(井白), 호는 벽은(僻隱). 무성군(茂城君)예남(禮南)의 5대손으로, 역관 시영(時英)의 아들이며, 화원으로 사과(司果)를 지낸 재기(再起)의 형이고, 화원으로 첨사를 지낸 허승현(許承賢)의 손서이다. 응회(應會)·응기(應期)·응상(應祥)의 세 아들을 두었다.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와 충익장(忠翊將)을 지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평정의 공이 있었으나 그 상훈을 사퇴하였다.
신임사화를 일으키게 한 고변(告變)으로 공신의 칭호를 받게 된 목호룡(睦虎龍)의 초상을 소론의 영수였던 김일경(金一鏡)의 강청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리지 않았다. 노론 4대신 중의 한 사람인 김창집(金昌集)의 상은 그렸다고 전하는 사실로 보아, 노론측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초상을 특히 잘 그려 1713년 숙종어진(肅宗御眞) 원유관본(遠遊冠本)과 익선관본(翼善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다.
산수에도 능하였다고 하나, 현존하는 유작으로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월하취적도 月下吹笛圖> 한 점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소나무 밑의 바위에 앉아 달빛을 받으며 피리를 부는 선비를 소재로 삼은 것으로, 인물과 소나무, 그리고 비스듬히 솟아오른 산의 형태와 그 표면 등을 전형적인 절파풍(浙派風)으로 처리하였다.
그 뒤로는 이러한 화풍이 실질적인 종말을 고하였기 때문에,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화풍의 마지막 화가로 지칭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