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재해 ()

회화
인물
조선후기 숙종어진 원유관본, 익선관본도사의 주관화사로 활약한 화가.
이칭
정백(井白)
벽은(僻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1년(숙종 17)
사망 연도
1769년(영조 45)
본관
풍기(豊基)
주요 관직
충익장
관련 사건
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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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숙종어진 원유관본, 익선관본도사의 주관화사로 활약한 화가.
개설

본관은 풍기(豊基). 자는 정백(井白), 호는 벽은(僻隱). 무성군(茂城君)예남(禮南)의 5대손으로, 역관 시영(時英)의 아들이며, 화원으로 사과(司果)를 지낸 재기(再起)의 형이고, 화원으로 첨사를 지낸 허승현(許承賢)의 손서이다. 응회(應會)·응기(應期)·응상(應祥)의 세 아들을 두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와 충익장(忠翊將)을 지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평정의 공이 있었으나 그 상훈을 사퇴하였다.

신임사화를 일으키게 한 고변(告變)으로 공신의 칭호를 받게 된 목호룡(睦虎龍)의 초상을 소론의 영수였던 김일경(金一鏡)의 강청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리지 않았다. 노론 4대신 중의 한 사람인 김창집(金昌集)의 상은 그렸다고 전하는 사실로 보아, 노론측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초상을 특히 잘 그려 1713년 숙종어진(肅宗御眞) 원유관본(遠遊冠本)과 익선관본(翼善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畫師)로 활약하였다.

산수에도 능하였다고 하나, 현존하는 유작으로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월하취적도 月下吹笛圖> 한 점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 그림은 소나무 밑의 바위에 앉아 달빛을 받으며 피리를 부는 선비를 소재로 삼은 것으로, 인물과 소나무, 그리고 비스듬히 솟아오른 산의 형태와 그 표면 등을 전형적인 절파풍(浙派風)으로 처리하였다.

그 뒤로는 이러한 화풍이 실질적인 종말을 고하였기 때문에,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화풍의 마지막 화가로 지칭되고 있다.

참고문헌

『화사양가실록(畵寫兩家實錄)』
『근역서화징』(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한국회화사』(안휘준, 일지사, 1980)
「한국절파화풍의 연구」(안휘준, 『미술자료』 20, 1977)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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