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복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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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복 초상 유복본
조영복 초상 유복본
회화
작품
국가유산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조영복(1672-1728)을 그의 동생 조영석과 화원 진재해가 각각 그린 두 점의 초상화.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조영복 초상(趙榮福 肖像)
분류
유물/일반회화/인물화/초상화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99년 12월 15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로 6 (상갈동, 경기도박물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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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조영복(1672-1728)을 그의 동생 조영석과 화원 진재해가 각각 그린 두 점의 초상화.
내용

199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연거복본(燕居服本) 조영복 초상화는 사방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평상복 차림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화면 왼편을 향하여 약간 돌아앉은 자세이고 배경은 전혀 없다. 가슴에는 붉은 세조대(細條帶)를 매고 거기에 부채를 매달았으며 양손을 다리에 얹고 있다. 오른쪽 위에 적혀있는 글에 따르면 조영석이 자신의 큰 형님인 조영복 54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1724년 유배지에 가서 초본을 그려내고 1725년 조영복이 사면되어 복직하자 초본을 수정한 후 자신은 연거복본을 그리고 진재해로 하여금 공복(公服)을 입은 시복본을 따로 그리도록 하였다고 한다.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 초상화는 조선시대 초상화로서는 드물게 양손을 모두 표현하고 있다.

초상에 실려 있는 조영석의 발문은 다음과 같다.

“이는 나의 큰형 이지당부군의 54세 초상이다. 지난 갑진년 영석이 영춘(永春)의 적소에서 부군을 뵙고 초본을 그렸다. 다음해 을사년 부군이 조정에 돌아와 대략 윤색을 더하고 화사 진재해에게 명령하여 별도의 공복본을 그리게 하고 영석은 이 본을 그렸다. 숭정 기원후 두번째 임자년(1732년) 7월 정미(23일) 아우 영석이 삼가 쓰다.[此我伯氏二知堂府君五十四歲眞像也. 昔在甲辰榮祏, 拜府君於永春謫中, 始出草. 明年乙巳及 府君還朝, 略加潤色, 命畵師秦再奚, 別作公服本. 榮祏寫此本云. 崇禎紀元後再壬子七月丁未弟榮祏謹書]”

문인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조영석은 풍속화를 선구적으로 그렸으며 인물화와 말그림에 뛰어났다. 이 초상화를 보고 감탄했던 영조는 1748년 숙종어진을 모사할 때 조영석한테 그리라고 했지만 조영석은 사대부가 화원이 할 일을 대신 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거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편 시복본 조영복 초상화는 오사모를 쓰고 분홍색 시복을 입은 채 양손은 소매 속에 감추고 호랑이 가죽이 깔려있는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역시 화면 왼편으로 조금 비켜 튼 자세다. 오른편 위에 개성 유수 조영복의 54세 초상을 진재해가 그렸다고 적혀있다. 진재해는 당시 초상화를 잘 그려 국수(國手)로 알려졌는데 분명한 윤곽선을 위주로 얼굴을 표현했다. 굳게 다문 가는 입술, 짧고 성긴 수염, 약간 처진 눈꺼풀, 넓적한 얼굴 표현 등은 조영석이 그린 초상화와 거의 동일하여 같은 초본을 바탕으로 삼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진재해의 작품에서는 극사실적으로 정교하게 그린 호랑이 가죽, 발받침, 돗자리 등에서 그의 솜씨가 잘 드러난다. 한편 높은 오사모, 소매가 넓은 시복, 채전이 그려지지 않은 점 등은 18세기 초의 초상화의 양식적 특징이다.

연거복본에서는 흰 사방건을 쓰고 있으며, 시복본에서도 백혜를 신고 있는데, 이는 경종의 국상에 따른 애도의 표시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조영복 초상화 두 점은 당대 대표적인 문인화가 조영석과 최고의 초상화가 진재해가 동일한 인물을 그렸기에 두 사람의 솜씨를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초상화』(조선미, 돌베개, 2009)
『초상, 영원을 그리다』(경기도박물관, 2008)
「조영석과 진재해의 조영복초상에 대하여」(유홍준, 『경기도박물관 연보』3호, 경기도박물관, 2000)
「관아재조영석화학고 하」(강관식, 『미술자료』45, 국립중앙박물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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