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 목판본으로 그림을 찍은 것인데 그 위에 다시 진한 채색을 사용하여 그렸다. 그림의 제일 위쪽에는 단청으로 장식된 창방과 그 아래로 드리워져 있는 차일을 배경으로 “대성지성문선왕전(大成至聖文宣王殿)”이라고 적힌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편액 아래에는 푸른 바탕에 금색 글자가 적힌 판액(板額)이 있으며, 좌우로 장막이 젖혀져 있어 건물의 내부가 보인다. 가운데 정면을 향해 앉은 인물이 공자이고, 곁에는 사성(四聖)에 해당하는 인물을 소목법(昭穆法 : 종묘나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방법, 즉 시조를 가운데에 모시고 시조의 왼쪽 줄을 소, 그 오른쪽 줄을 목이라 함)에 따라 안회(顔回)·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순서로 동서에 번갈아 가면서 배열했다. 양편으로는 십철(十哲)에 해당하는 인물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배치했다. 공자를 제외하고 각 인물마다 머리 위쪽에 붉은 색으로 네모난 띠를 그리고 금물감으로 윤곽을 둘러치고 칭호를 적어 놓았다.
난간과 답도(踏道)를 경계로 위는 실내를 아래는 건물 밖을 나타낸다. 아래쪽에는 좌우로 벌어지는 2중의 대각선 구도로 73명을 4열로 배치하고, 맨 아래 가운데는 10명을 배열했다. 한대(漢代)에 정립된 공자의 72제자가 등장해야 하지만, 실수로 맨 왼편 열에 1명이 추가되었고 이름은 72명만 적었다. 여기에 당대의 한유(韓愈)부터 원대의 오징(吳澄)까지 후대의 유학자 10명을 덧붙였다.
공자는 다른 인물보다 크게 그려 강조했으며, 다른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공자 얼굴의 특징이 드러난다. 다른 인물들은 위계에 따라 크기가 작고, 가운데를 향하여 약간 돌아앉아 있다. 인물들은 모두 의자에 앉은 모습인데 머리에 일월이 표시된 평천판(平天板)이 있는 관을 쓰고 소매가 넓고 화려한 의복을 입었으며 양손으로 홀(笏)을 쥐고 있다. 인물에 따라 수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대체로 얼굴은 비슷하여 개성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같은 자세와 비슷한 외모로 질서정연한 인상을 준다.
건물 안팎의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는 것으로 그렸는데,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아서 아래쪽은 수직으로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왼편 아래쪽에 일부 남아 있는 목판본 밑그림의 화기(畵記)에는 1513년 제작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소수서원(紹修書院)에는 이 작품과 일치하는 조각 그림 3점이 함께 전해오는데, 비단에 먹으로 그린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것은 고려 때인 1303년 안향(安珦)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상태로 볼 때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며, 안영호(安永鎬)의 문집 『급산집(岌山集)』에는 공자와 후학들의 초상을 1822년 중국 화공을 불러 그린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반차도의 국적과 제작연대를 아직은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공자와 제자들을 모시는 문묘의 대성전에서 이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 조각상을 만들어 모시기도 했는데, 명대 중엽 그리고 조선시대 중반부터 불교적인 관습이라고 비판하고 점차로 조각상을 치우고 나무로 만든 위패를 모셨다. 간혹 공자의 초상화를 제사에서 모시는 경우는 있었지만 제자들까지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실적인 형상으로 공자와 제자들의 배치를 재현한 이 작품은 매우 특이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