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초상화는 오사모를 쓰고 쌍학 흉배가 붙은 단령을 입었으며 삽금대를 착용한 채 화면 왼편을 향하여 몸을 약간 튼 자세이다. 배경은 그리지 않았고 오른편 위에 (任埅, 1640-1724)의 초상으로 기사첩(耆社帖)에서 남은 것을 1744년(영조 20)에 표장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사첩은 1720년(숙종 46)에 완성된 「기사계첩(耆社契帖)」을 가리키는 것이다.
「기사계첩」은 1719년(숙종 45)에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열렸던 행사와 이에 참석했던 기로대신을 그린 화첩이다. 당시 80세로 가장 나이 많은 참석자였던 임방은 「기사계첩」의 서문을 썼다. 이 화첩에 포함된 임방의 초상화는 크기가 작다는 것을 제외하면 경기도박물관 소장의 초상화와 도상과 양식이 매우 유사하다.
오사모는 위아래가 구분된 형태를 정확하게 묘사했고 날개에도 착시현상에 따라 어른거리는 무늬를 표현했다. 얼굴은 갈색 필선으로 이목구비와 주름을 섬세하게 나타내고, 옅은 갈색으로 윤곽선 부위를 칠하여 굴곡을 나타냈다. 단령의 옷주름도 사실적이고 자연스럽게 처리했으며 역시 명암을 표현하여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2009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임방은 송시열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한 후 숙종대에 공조판서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금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임방은 일찍이 연잉군(훗날 영조)의 세제 책봉에 앞장 선 바 있었다. 1744년(영조 20)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기사계첩」을 살펴보고 「기사경회첩」을 만들었는데, 이 무렵 임방에 대해 회고한 일이 있다. 따라서 이 초상화가 1720년(숙종 46)에 제작되었다가 임방이 죽은 후 한참 뒤인 1744년(영조 20)에 비로소 새로 표장되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