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화면 왼편을 향하여 몸을 살짝 돌린 자세로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높은 오사모를 쓰고 검은 단령을 입고 양손은 소매 속으로 감추고 있다.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이 깔려있다. 돗자리가 덮인 족좌대(足座臺) 위에는 양쪽으로 벌린 흑피혜(黑皮鞋)가 일부만 보인다. 공작흉배와 서대를 착용하고 있어 정1품 신분임을 알려준다. 단령 소매 사이로 흰 창의가 보이며, 의자의 손잡이는 인물의 양 편으로 뻗어 있다. 오른편 의자 뒤로는 단령에 덧댄 무가 세모꼴로 접혀 올라가 있으며, 그 아래 트임 사이로는 연두색 안감과 청색의 첩리가 보인다.
이원익은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왕족 종실 출신이자 문신, 시인, 정치인이다. 음서로 관직이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러 다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초상화는 이원익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무사히 피난하도록 했던 공적을 인정받아 58세가 되던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錄勳)된 것을 기념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호성공신 초상화나 같은 해 조성된 청난공신(淸難功臣)과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초상화에 비해 오사모 상단이 높아서 특이하다. 오사모의 양쪽 날개에는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가늘고 붉은 선을 사용하여 묘사했는데, 인물의 생김새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분홍색을 살짝 칠한 코 끝과 볼 부분을 제외하고는 음영 효과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듬성듬성 흰 터럭이 섞여 있는 수염은 숱이 그다지 많지 않으나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단령의 윤곽과 주름 역시 단순하게 선을 위주로 표현했고, 전체적으로 구름무늬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평면적인 인상을 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손꼽히는 이원익의 초상은 현재 여러 점의 다양한 작품이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 이 초상화를 1663년에 모사한 것이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고, 초본으로 추성되는 작품도 전하고 있다.
1604년에는 호성·선무·청난의 삼공신이 한꺼번에 책훈되었다. 삼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무사히 호종한 호성공신, 전쟁 중에 무훈을 세운 선무공신, 그리고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청난공신이다. 109명의 정공신 중에서 생존해 있는 64명의 초상화가 한꺼번에 제작되었고 여러 화가들이 공동으로 작업에 참가했기 때문에 얼굴을 제외한 전체 구도와 신체비례 그리고 세부묘사에서는 서로 비슷하게 되었다. 이원익 초상화는 현재 남아 있는 삼공신 초상화로서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