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대에 영의정에 올랐던 류상운(柳尙運, 1636~1707)은 1680년(숙종 6)대에 평안도관찰사를 두 차례 역임했다. 당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초상화를 만들고 생사당을 지어 모셨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초상화 1점은 평양에 모셔졌던 것이고, 또 다른 1점은 후대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평양 사당에 봉안되었던 초상화는 그림 위 표장 부분에 “관찰사겸순찰사 유고상운화상(觀察使兼巡察使柳公尙運畵像)”이라고 적혀 있는데 보관상태가 좋지 않다.
모사본 오른쪽 위에는 “조선국영의정 시충간유공휘상운 자수구호약재오십세진(朝鮮國領議政諡忠簡柳公諱尙運字悠久號約齋五十歲眞)”이라고 적혀 있는데 사당에 봉안되었던 작품을 기초로 18세기경 이모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 작품은 관복의 색상, 호피의 무늬, 세부 필치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류상운 초상은 정면상이며 단령을 입은 채 두 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가슴에는 문관 2품을 나타내는 운안흉배가 붙어 있다. 얼굴은 분명한 선묘를 사용해서 표현했으며 동공 주위 눈동자를 금색으로 칠해서 독특하다.
생사당에 모셨던 초상화로서 알려진 예는 많지 않다. 임진왜란 때 평안도순찰사였던 이원익의 경우 정도가 알려져 있다. 따라서 류상운 초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되고 봉안되었던 조선시대 초상화의 용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류상운과 가까웠고 같은 소론에 속했던 남구만(南九萬), 신익상(申益相), 윤증(尹拯), 박세채(朴世采) 등도 정면상의 초상화를 남기고 있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