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어서송언신밀찰첩』은 선조가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에서 1599년까지 6년간에 걸쳐 당시 함경도관찰사 송언신에게 내린 친필 서찰이다. 행서로 쓰여진 어찰은 원래 12건이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7건이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면서 왕의 자녀 3인을 찾아 보호해 달라는 내용과 군신간에 선물을 주고 받은 목록 등이다.
이는 선조의 어제어필로서, 문학적·서예적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어찰의 내용이 단순히 안부를 묻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전쟁의 상황, 북변의 방어 등 국방에 관한 사료로서의 가치 또한 높다. 또 당시 군신간의 사신내왕, 선물교환 등의 연구에도 참고 자료가 된다. 그리고 선조가 신뢰하는 신하를 관리하는 정치적 수완도 아울러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정조어제선조어서밀찰발』은 정조가 1794년에 송언신 후손가에 소장된 선조 밀찰을 보고 나서 소감을 적은 것이다. 총 59행을 매면 6행씩 총 10면으로 서첩을 만들었다. 7건의 선조 어찰에 대해 내용 해설을 곁들여 자세히 기술하였다. 정조가 반초서로 직접 쓴 발문은 선조 어찰의 내용을 해설, 평가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동시에 시문·서예에도 뛰어난 정조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만력 13년 2월 18일 예조입안」은 1585년 2월 18일에 예조에서 당시 병조정랑인 송언신에게 발급한 문서로서, 송언신이 자식이 없어서 10촌형 송승희(宋承禧)의 둘째아들 송준(宋駿)을 후사로 삼겠다는 소지(所志)에 대해 예조에서 이를 허가한 것이다. 이 문서는 입양 관계 문서로서 시대가 올라가며 송언신 가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송언신의 초상은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공수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인데, 그림의 왼편을 향해 약간 비껴 앉아 있다. 가슴에는 모란과 운안(雲雁) 문양을 한 흉배가 부착되어 있으며, 삽금대를 두르고 있어 1603∼14년에 정이품의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낸 송언신의 당시 품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단령 소매 사이로 흰 창의가 보이며, 의자의 손잡이는 인물의 양 편으로 뻗어 있다. 바닥에는 채전(彩氈)이 깔려 있고 족좌대(足座臺) 위에는 양쪽으로 벌린 흑피혜(黑皮鞋)가 일부만 보인다.
그림에는 세 곳에 글이 적혀있다. 왼쪽 채전의 위의 글은 광해군이 즉위한 후 관직에서 물러난 송언신이 1611년에 광주(廣州) 방암(放菴)에 은거하면서 직접 써 넣은 것이다. 과거의 영화가 드러나는 초상화를 보면서 만년의 처지를 칠언시로 읊은 것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는 그림이 그려진 내력을 밝혀 놓았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송언신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록하려고 했으나 의견이 분분하자 스스로 사양하여 정공신이 아닌 원종공신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공신에게만 해당하는 공신초상을 이미 만들었기에 보내왔다고 한다. 오른쪽 위에 1604년 선무공신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 선무원종공신이라고 해야 맞다.
초상화의 양식은 당시 제작된 선무, 호성(扈聖), 청난(淸難) 공신초상과 같다. 오사모는 높이가 낮고 윗부분이 평평하며 날개는 넓고 끝이 둥글다. 단령은 구름 무늬를 평면적으로 연속해서 묘사했고 목에 파진 부분이 옆으로 완만하게 넓으며 흰 옷깃이 짧게 나와 있다. 의자 뒤로는 단령에 덧댄 무가 삼각형 모양으로 뒤로 뻗쳐 튀어나와 있다. 얼굴 표현에서는 음영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윤곽선과 주름에만 약간씩 어둡게 처리하여 평면적이고 넓적하게 느껴진다. 17세기 초 선조대 공신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