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의 모습과 자세는 2005년 보물로 지정된 이원익의 초상화와 거의 같은데 다만 바닥에는 채전이 그려지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오사모에서부터 얼굴 부분을 포함하여 흉배 위까지는 별도의 종이에 그렸던 것을 오려 붙인 것이다. 나머지 몸체 부분은 이에 맞추어 나중에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뒷면에 1604년(선조 37)에 그린 이원익 초상화의 초본이라는 내용을 글이 적혀있다. 2009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원익은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 예조 · 이조 판서, 의정부 좌의, 영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2등(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二等)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또 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2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녹훈되기도 하였다.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키 때문에 키작은 재상, 정승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을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공신초상화가 2005년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따라서 공신상을 그릴 때 사용했던 초본을 이용하여 이 초상화를 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오사모 표현에서 약간 차이가 있어 초본 자체도 후대에 다시 모사한 것일 수도 있다.
얼굴 표현을 살펴보면 살구색을 옅게 칠한 후, 가늘고 붉은 선을 사용하여 이목구비의 윤곽과 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음영효과를 주기 위해 살짝 붉은 색을 칠한 한 코 끝 부분에는 실핏줄이 드러나 있을 정도로 세밀하다. 수염 부분에는 풍성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옅은 먹을 칠했고, 인물의 인상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그러나 흉배와 나머지 관복 부분의 표현은 그다지 정교하지 않아서 나중에 다시 그려 넣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초상화 정본을 그리기에 앞서서 미리 인물을 묘사하는 밑그림이 초본이다. 따라서 주인공을 직접 보고 그린 초본이 정본보다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본을 완성한 후에 대개 초본은 없애 버렸기 때문에 남아 전하는 초본의 수량은 적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전래되던 초상화의 얼굴 부분을 부분적으로 이용하여 다시 전신상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간혹 있어 왔다. 이 작품은 이러한 양상을 알려주는 귀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