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영지(英之). 호는 임진당(任眞堂). 채효순(蔡孝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채담(蔡潭)이고, 아버지는 첨정 채자연(蔡子涓)이며, 어머니는 유효용(柳孝庸)의 딸이다.
1510년(중종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9년 검열을 거쳐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밤 가승지 김근사(金謹思)가 그의 붓을 빼앗아 조광조(趙光祖) 등의 죄를 대역죄인으로 고치려 들자, 사필(史筆)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다시 빼앗는 기개를 보여 세상에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때문에 파직당하였다. 그 뒤 1533년 세자시강원의 문학·필선·보덕, 집의를 역임한 뒤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을 거쳐 1537년 대사성이 되었고, 1539년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첨지중추부사로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호조참의·병조참의·우승지·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이어 1550년 호조참판으로 동지춘추관을 겸직하였고, 『중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 후 공조판서·호조판서를 지내고 우참찬을 거쳐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천문과 의약에 밝았고, 중국어에도 능하여 1548년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하기도 하였다.
그가 비록 처음에는 기묘사화로 청명(淸名)을 얻었으나 후일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내전에 친하려 든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