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척화비 ( )

목차
관련 정보
청주 척화비
청주 척화비
근대사
유적
문화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에 있는 조선후기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세운 비. 척화비. 시도기념물.
목차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에 있는 조선후기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세운 비. 척화비. 시도기념물.
개설

1978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 청주시 남문로 2가 중앙공원에 있다. 2단의 대석을 쌓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는데, 비신은 윗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남아 있는 부분의 규모는 높이 95㎝, 폭 46㎝, 두께 19㎝이며 다소 거친 화강암으로 된 비갈형(碑碣形) 비석이다.

내용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의 외침을 격퇴한 뒤 전승을 기념하고 일반 백성들에게 서양 배척의 의지를 보다 확고히 천명하기 위해 1871년 4월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다.

그 내용은 병인년 이래의 척사(斥邪) 구호인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며, 화친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主文)이 있다. 그리고 그 보다 작은 글씨로 쓴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우리들 자손 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원군의 척화비는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에 청군(淸軍)이 개입해 그를 청나라에 납치해 가고 고종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청주 척화비도 이 때 철거당했는데, 그마저 폐기 상황이 좋지 않았던 듯 현재와 같이 윗 부분은 떨어져 나간 채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비석은 1976년 2월 20일정찬일(鄭燦日)이 청주시 석교동(石橋洞) 92-12번지의 신충구(申忠求)의 집 앞 길가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해 현재 위치로 옮겨 놓았다. 비문은 ‘양이침범비전’이 1행을, ‘즉주화매국’이 2행을,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이 3행을 구성하고 있는데, 1행의 첫 자인 ‘夷(이)’자와 2행의 위 두 글자인 ‘則(즉)’자와 ‘和(화)’자가 떨어져 나갔으며, 3행도 위 두 글자인 ‘戒(계)’자와 ‘我(아)’자가 떨어져 나갔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문화재지(文化財誌)』(충청북도, 1982)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김진봉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