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