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형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판서, 대사성,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예경(禮卿)
죽하(竹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05년(순조 5)
사망 연도
1878년(고종 15)
본관
삭녕(朔寧)
주요 관직
판서|대사성|제학
정의
조선 후기에, 판서, 대사성,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예경(禮卿). 호는 죽하(竹下). 최경(崔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헌중(崔獻重)이고, 아버지는 증좌찬성 최종문(崔鍾問)이며, 어머니는 이재정(李載廷)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37년(헌종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사(蔭仕)로 참봉을 거쳐 대흥군수 겸 홍주진관병마첨절제사(大興郡守兼洪州鎭管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1850년(철종 1)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응교를 역임하고, 이듬해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가 제세안민의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산릉도청(山陵都廳)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1852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국·한문 혼용의 「연행별곡(燕行別曲)」을 남겼다. 1857년 김해도호부사로 외직에 나가 임기를 마치고, 1859년에 승정원우부승지를 지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사헌부대사헌·한성부판윤을 거쳐 1866년(고종 3) 이후로 이조·형조·공조·예조 판서를 차례로 역임하고, 1875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되어 판의금부사로 영풍군(寧豊君)에 봉해졌다. 훈당(勳堂)을 거쳐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성균관대사성으로 재임할 때에는 유생교육에 힘썼고, 홍문관·예문관 제학이 되어서는 모든 문한을 제찬하고 경서를 진강하였다. 특히, 시문에 능하였으며, 저서는 『죽하집』 8권 4책이 있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죽하집(竹下集)』
집필자
이명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