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화산성(推火山城)은 밀양강과 경상북도 경주 방면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단장천이 합류하는 추화산 정상에 위치한 석축 산성으로, 둘레가 1,430m에 이르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동문과 남문이 있고 북쪽 계곡의 평지에는 만들어진 시기를 알 수 없는 우물, 집수지, 부속 건물들이 있다. 산성의 정상부에는 추화산 봉수대가 시굴 조사를 거쳐 복원되어 있다.
밀양은 고려 995년(성종 14)에 밀주자사를 두었다가 현종 9년(1018)에 지밀성군사를 두었던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밀성군이 되었다가 밀양도호부로 다시 승격된 읍격이 높은 고을이었다.
특히 추화산은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광리군에 봉해진 고려 개국공신 손긍훈을 모신 성황사가 있던 곳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추화산과 추화산성은 밀양을 대표하는 장소로 손긍훈과 관련된 의례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러나 밀양은 1274년(충렬왕 원년) 삼별초의 난 때 적과 내통한 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었고, 진산도 추화산에서 백화산으로 바뀌게 되면서 추화산성은 그 상징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추화산성의 체성(体城) 내탁(內托)부는 먼저 암반층을 깎아 넓고 평평하게 땅을 고르고 두께 25cm 정도의 판상 석재를 평평하게 쌓았다. 외벽의 바깥 100cm 지점에 보축(補築)과 함께 외벽의 돌을 사면의 일정 높이까지 내탁 수법으로 쌓은 후 그 사이에는 잡석을 채워 넣었다. 외벽 보축의 폭은 대체로 100cm를 유지하지만 더러 540cm까지 넓어지는데 이러한 부분은 통로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체성부의 적심(積心)과 생토면(生土面)이 노출된 산자락 사이를 점토로 다짐하여 400cm 정도 높이로 체성을 쌓아올렸다. 산성의 협축(挾築)부는 체성의 폭과 같이 400cm로 하여 내벽부에도 판상의 석재를 평평하게 쌓는 협축(夾築)의 방식으로 성벽을 올렸다. 내벽의 높이는 4~5단 정도 남아 있고 높이는 80cm 가량이다.
추화산의 능선 상에 위치한 남문은 750cm 폭으로 생토를 골라 평탄면을 조성한 후 수혈(水穴)을 파고 적심을 채운 후 초석을 놓았다. 그 위해 정면 1칸, 측면 1칸의 문루(門樓)를 설치하였다. 남쪽 곡각지 내부에서 산성을 초축할 당시의 수혈 주거지(竪穴住居址)가 출토되었는데 고려시대에 이를 메우고 기와 건물지로 고쳐 지었다. 동문지는 남문지와 달리 계곡을 메워서 체성과 높이를 맞춘 다음 초석과 판석을 깔아 만들었는데, 길이와 너비가 710cm인 장방형(長方形) 구조로 되어 있다.
추화산성은 남쪽 수혈 주거지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건물지로 다시 사용된 것이나 단각고배, 인화문토기, 승렴문호, 파상문 단경호, 순청자 접시, 상감청자 종지, 분청자 저부편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이 고루 출토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성이 처음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전기까지 사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