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화산성 ()

추화산성
추화산성
건축
유적
문화재
삼국시대, 경상남도 밀양시 추화산(해발243m)에 축조된 신라의 석축 포곡식 산성.
유적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관련 인물
손긍훈
높이
4m
둘레
1,430m
면적
90,912㎡
소재지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376-1번지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상남도
종목
시도기념물(1990년 1월 16일 지정)
소재지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376-1번지
내용 요약

추화산성(推火山城)은 밀양강과 단장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신라의 석축 포곡식 산성이다. 동문과 남문, 북쪽 계곡에는 우물과 집수지, 부속 건물 등이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내부에서 단각고배, 인화문토기, 승렴문호, 파상문 단경호, 순청자 접시, 상감청자 종지, 분청자 저부편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시대(6세기 후반경)에 초축되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전기까지 산성이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의
삼국시대, 경상남도 밀양시 추화산(해발243m)에 축조된 신라의 석축 포곡식 산성.
산성의 위치

추화산성(推火山城)은 밀양강과 경상북도 경주 방면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단장천이 합류하는 주6 정상에 위치한 석축 산성으로, 둘레가 1,430m에 이르는 주7 산성이다. 동문과 남문이 있고 북쪽 계곡의 평지에는 만들어진 시기를 알 수 없는 우물, 집수지, 부속 건물들이 있다. 산성의 정상부에는 추화산 주14가 시굴 조사를 거쳐 복원되어 있다.

변천

밀양은 고려 995년(성종 14)에 밀주자사를 두었다가 현종 9년(1018)에 지밀성군사를 두었던 주2 또한 조선시대에는 밀성군이 되었다가 밀양도호부로 다시 승격된 읍격이 높은 주3

특히 추화산은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광리군에 봉해진 고려 개국공신 손긍훈을 모신 성황사가 있던 주4 따라서 고려시대에 추화산과 추화산성은 밀양을 대표하는 장소로 손긍훈과 관련된 의례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러나 밀양은 1274년(충렬왕 원년) 삼별초의 난 때 적과 내통한 일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었고, 주15도 추화산에서 백화산으로 바뀌게 되면서 추화산성은 그 상징성을 잃어버리게 주5

형태와 특징

추화산성의 체성(体城) 내탁(內托)부는 먼저 암반층을 깎아 넓고 평평하게 땅을 고르고 두께 25cm 정도의 판상 석재를 평평하게 쌓았다. 외벽의 바깥 100cm 지점에 주8과 함께 외벽의 돌을 사면의 일정 높이까지 내탁 수법으로 쌓은 후 그 사이에는 잡석을 채워 넣었다. 외벽 보축의 폭은 대체로 100cm를 유지하지만 더러 540cm까지 넓어지는데 이러한 부분은 통로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체성부의 적심(積心)과 생토면(生土面)이 노출된 산자락 사이를 점토로 다짐하여 400cm 정도 높이로 체성을 쌓아올렸다. 산성의 협축(挾築)부는 체성의 폭과 같이 400cm로 하여 내벽부에도 판상의 석재를 평평하게 쌓는 주9의 방식으로 성벽을 올렸다. 내벽의 높이는 4~5단 정도 남아 있고 높이는 80cm 가량이다.

추화산의 능선 상에 위치한 남문은 750cm 폭으로 생토를 골라 평탄면을 조성한 후 주10을 파고 적심을 채운 후 주16을 놓았다. 그 위해 정면 1칸, 측면 1칸의 주12를 설치하였다. 남쪽 곡각지 내부에서 산성을 초축할 당시의 수혈 주거지(竪穴住居址)가 출토되었는데 고려시대에 이를 메우고 기와 건물지로 고쳐 지었다. 동문지는 남문지와 달리 계곡을 메워서 체성과 높이를 맞춘 다음 초석과 주17을 깔아 만들었는데, 길이와 너비가 710cm인 주13 구조로 되어 있다.

추화산성은 남쪽 수혈 주거지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건물지로 다시 사용된 것이나 단각고배, 인화문토기, 승렴문호, 파상문 단경호, 순청자 접시, 상감청자 종지, 분청자 저부편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이 고루 출토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성이 처음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전기까지 사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주1

의의 및 평가

추화산성은 경주와 상주로 향하는 수로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에 세워진 성으로 삼국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용된 곳이다. 다만 산성의 내부 조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산성이 처음 만들어진 이래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밀양 추화산은 고려 개국공신 손긍훈과 관련된 성황사가 있던 고려시대의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또한 추화산과 추화산성은 창녕 화왕산성이나 광양 마로산성과 같이 진산에 축조된 성곽이라는 점에서 관련된 차원에서 연구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동아대학교 박물관, 『밀양추화산봉수대 시굴조사보고서』(2001)
동아대학교 박물관, 『밀양추화산성 시굴조사보고서』(2002)
주석
주1

동아대학교 박물관, 2001, 『밀양추화산봉수대 시굴조사보고서』, 2002, 『밀양추화산성 시굴조사보고서』

주2

高麗史 地理志 密城郡 本新羅推火郡, 景德王, 改今名, 高麗初, 因之. 成宗十四年, 爲密州刺史. 顯宗九年, 稱知密城郡事. 忠烈王元年, 以郡人趙仟殺郡守, 以應珍島叛賊三別抄, 降爲歸化部曲, 屬之雞林. 先是, 臺省屢請降號, 用事者, 受邑人賂, 每沮之. 至是, 復極論, 從之. 後復稱密城縣. 十一年, 陞爲郡. 又降爲縣. 恭讓王二年, 以曾祖益陽侯妃朴氏內鄕, 陞爲密陽府.

주3

世宗實錄 150卷, 地理志 慶尙道 慶州府 密陽都護府 ◎ 密陽:都護府使一人。 本推火郡, 新羅 景德王改爲密城郡, 高麗因之。 顯宗九年戊午, 置知郡事。 忠烈王元年甲戌, 【卽元 世祖 至元十一年。】 以郡人趙仟殺郡守, 以應珍島叛賊三別抄, 降爲歸化部曲, 十二年乙酉, 復陞爲密城郡。 恭讓王二年庚午, 以曾祖益陽侯妃朴氏內鄕, 陞爲密陽府, 本朝太祖元年壬申, 【洪武二十五年。】 還爲密城郡。 甲戌, 以郡人宦者金仁甫入侍大明, 奉使而來, 復陞爲密陽府, 太宗元年辛已, 還爲郡。 乙未, 以千戶以上, 陞爲都護府。

주4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二十六 慶尙道 密陽都護府 祠廟 城隍祠。在推火山。世傳府吏孫兢訓佐高麗太祖有功,追贈三重大匡、司徒,封廣理君,卽祠神也。

주5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二十六 慶尙道 密陽都護府 山川 華嶽山。或云屯德。在府北十九里。鎭山。推火山。在府東五里。

주6

해발 243m

주7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 우리말샘

주8

건물이나 구조물 따위의 기본적인 것에 일부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지음. 우리말샘

주9

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일. 우리말샘

주10

구덩이 안 바위틈의 물구멍. 우리말샘

주12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13

내각(內角)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 주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4

봉화를 올리던 둑. 전국에 걸쳐 여러 개가 있었는데, 특히 남산은 각 지방의 경보(警報)를 중앙에 전달하는 국방상 중대한 임무를 전담하는 곳으로 다른 곳과 달리 다섯 개나 있었다. 우리말샘

주15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 조선 시대에는 동쪽의 금강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묘향산, 북쪽의 백두산, 중심의 삼각산을 오악(五嶽)이라고 하여 주산으로 삼았다. 우리말샘

주16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우리말샘

주17

판자 모양으로 가공되어 바닥이나 벽면에 붙이는 석재. 암석 가운데 15~38cm의 납작하고 편평한 암석을 말한다. 지붕, 바닥, 벽면이나 도로 따위에 이용된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정의도(한국성곽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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