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성지 ()

대정성지
대정성지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 태종 18년에, 초축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조선시대 대정현의 읍성.
이칭
이칭
대정현성, 대정읍성, 대정성(大靜城)
유적
건립 시기
조선 태종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유신
높이
2.8~3.7m
둘레
1,440m
소재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 인정리 · 보정리 일원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제주특별자치도
종목
시도기념물(1971년 8월 26일 지정)
소재지
서귀포시
내용 요약

대정성지(大靜城址)는 태종18년 대정현감 유신이 축조한 대정현 대정읍성의 터이다. 대정성(大靜城)은 조선 초기 초축된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수축되었다. 이 성은 평지에 축조된 보기 드문 읍성으로 4대문에 모두 옹성을 쌓았고 체성의 모서리에는 각치를 두었다. 대정읍성의 체성과 치성 일부는 복원 · 정비되었으나 성 내부의 건물지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키워드
정의
조선 태종 18년에, 초축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한 조선시대 대정현의 읍성.
위치와 현황

대정성지(大靜城址)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 인성리 · 보성리 일대에 남아있는 성곽의 터이다. 성내에는 사적 487호 추사유배지를 비롯하여 제주도 민속자료 제2호 돌하르방 12기, 제주 전통 옹기를 재현하는 가마터 등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1986년 성곽을 보수하기 시작한 이래 북벽과 동벽, 남벽 일원과 동북치, 서남치 등을 복원하였다.

건립 경위

기록에 의하면, 대정현성은 대정현이 설치된 2년 후인 태종 18년(1418)에 대정현감 유신에 의해 1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주1 대정현성의 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179보(7,074척)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2,647척으로 기록되어 주2 이렇듯 성의 둘레가 다르게 기록된 이유가 1416년(태종 16) 오식이 고정의성을 쌓았지만 1423년에 정의현성을 다시 쌓은 주3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지 혹은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밝혀진 바 없다.

변천

대정현성은 초축 당시 동 · 서 · 남쪽에 문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대동지지』에는 주11이 넷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후대에 성을 주12하는 과정에서 북문을 따로 설치한 것으로 주4 이러한 점은 대정현성의 둘레가 임진왜란 이전에는 2,647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국여지지』와 『대정현읍지』에는 4,890척으로 다르게 기록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주5

성 안에는 둘레 22장, 깊이 4척의 못과 남문 내에 둘레 4장, 깊이 6장 8척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13가 들면 못과 우물이 바로 말랐다고 주6 『남사록』에는 성 안에 '우물이 하나 있지만 가물면 말라버려서 관아의 남쪽 5리에 있는 파고천에서 물을 긷는다'라고 적혀 있다. 세종 12년과 25년에 '정의현과 대정현 두 현 모두 성내에 샘물이 없어 정의현은 토산으로 옮기고 대정현은 감산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결국 이 문제는 해결되지 주7 물 부족은 대정현성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였다.

형태와 특징

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정현성은 평지에 축조된 네모꼴의 성으로 동서의 길이는 380m, 남북의 길이는 320m, 둘레는 1,440m였다. 성의 각 모서리에는 각치(角雉)가 설치되어 있었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북측 체성(体城)의 외벽은 높이가 2.8m~3.7m, 내벽은 2.7m~3.6m, 폭은 2.7m~3.1m이고 관상용으로 사용된 주16 일부가 남아 있다. 주17은 상부가 훼손되어 알 수 없으나 둘레는 34.6m~42.8m이다. 동 · 서 · 남쪽의 문지와 옹성(甕城)은 훼손되었는데 동문의 옹성이 3~4단 정도 남아 있다.

체성은 현무암을 주14주15으로 다듬어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병행하여 외면을 맞추어 축조하였다. 치성은 성벽에 덧대어 주8

성의 안팎을 따라 너비 10척의 해자를 설치하였다고 주9 조사 결과 해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정현성에는 물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읍성 주위에 물이 흐르는 해자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보고서」에는 비가 오면 대정현성 주변으로 물이 모이는 것을 보고 해자를 설치했던 것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기재되어 주10

의의 및 평가

대정성지는 대정읍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한편 성곽이 초축된 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지만 이러한 기록만으로는 성이 변화해온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특히 다른 읍성의 경우 성의 높이가 대체로 15척을 넘지 않는데 비해 대정읍성은 28척, 정의현성은 24척에 달하는 높은 성이었다. 읍성의 높이에서 보이는 특이점이 제주 지역에 세워진 성의 특징인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대정읍성에 해자가 설치되었는지 여부도 기록된 것과 달라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원전

『世宗實錄 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東國輿地誌』
『輿地圖書』

단행본

서귀포시, 『대정성종합정비계획』(2012)
제주문화예술재단, 『대정읍성 학술조사보고서』(2006)
호남문화재연구원, 『제주 대정성지 관련 문화유적 발굴(시굴)조사 약보고』(2006)
주석
주1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八 全羅道 旌義縣 城郭 邑城。石築。周二千六百四十七尺,高二十八尺。○河澹記...

주2

世宗實錄 151卷, 地理志 全羅道 濟州牧 大靜縣 邑石城。【周回一千一百七十九步。】

주3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八 全羅道 旌義縣 城郭 邑城。石築。周二千九百八十六尺,高二十四尺。○裵樞記...

주4

濟州大靜旌義邑誌 大靜縣 城池 邑城 石築周三千二百步 高十七尺四寸 女堞二百四十 城門東西南三處 大東地志 城池 邑城 太宗十八年縣監兪信築 周四千八百九十尺 甕城四井一池一

주5

輿地圖書 全羅道 大靜郡古誌 城郭 縣城石築周四千八百九十尺高十七尺四寸女堞一百五十五有東西南三門設縣後二年戊戌縣監兪信所築

주6

大靜縣邑誌, 城池 縣城石築周回四千九十尺高十七尺四寸垜二百四十城樣表裏如削環城有濠闊十尺深七尺外有枳樹城中有池周回二十二丈深四尺南門內有井周回四丈深六丈八尺甚旱則渇

주7

世宗實錄 48卷, 世宗 12年 6月 4日 癸酉, 世宗實錄 99卷, 世宗 25年 1月 10日 丙寅

주8

제주문화예술재단, 2006, 대정읍성 학술조사보고서

주9

大靜縣邑誌, 城池 城樣表裏如削環城有濠闊十尺深七尺外有枳樹

주10

호남문화재연구원, 2006, 「제주 대정성지 관련 문화유적 발굴(시굴)조사 약보고」

주11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2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 우리말샘

주13

가뭄으로 인하여 입은 재해. 우리말샘

주14

내각(內角)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 주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5

네모반듯한 모양. 우리말샘

주16

아름다운 돌. 우리말샘

주17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8

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하게 둘러쌓은 산성이라는 뜻으로, 방비나 단결 따위가 견고한 사물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정의도(한국성곽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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