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화왕산성(昌寧 火旺山城)은 5세기 경 창녕을 조망할 수 있는 서쪽에 만들어진 토축 산성을 통일신라시대에 석축으로 개축한 석축 산성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잦은 외적의 침입을 겪던 창녕과 현풍 지역민을 보호하던 입보 산성이기도 하다. 초축된 화왕산성의 둘레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현재 남아 있는 화왕산성의 둘레는 고려 말~조선시대 전기에 정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 조씨 득성지로 알려진 집수지에서는 용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확인되어 진산에 만든 성을 제사처로 활용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창녕 화왕산성(昌寧 火旺山城)은 경상남도 창녕군의 진산인 화왕산 정상(해발 739m)에 위치한 산정식 석성이다.
창녕 화왕산성은 조선시대 각종 지지에 기록된 화왕산성과 그 이전 시기의 화왕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태종실록』에 화왕산성을 수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으며,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화왕산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들을 보았을 때, 화왕산성은 고려시대에 이미 축조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개국 초기까지 성주 가야산성, 양산 성황당산성 등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이 입보(入保)용 산성으로 운영되었던 것도 알 수 있다.
조선 세종대 이후에는 국가 정책으로 군현마다 입보성과 치소성(治所城)의 기능을 합친 석축 읍성을 지속적으로 축조하였다. 그래서 성종대에 이르면 화왕산성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게 되면서 주요 지역에 축조된 산성을 수축(修築)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곽재우 장군이 화왕산성에서 왜적을 막은 사실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화왕산성이 고적조에 실려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화왕산성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의미한다.
창녕 화왕산성은 둘레 2700m의 석축 산성(石築山城)이다. 서문에 비해 동문은 여러 차례 수축된 것으로 보이지만 비교적 문의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성벽을 따라 확인되는 건물지(建物址)는 조선시대에 초소로 만들어져 운영되던 곳이다.
창녕 화왕산성은 서쪽으로는 창녕읍을 조망할 수 있지만 나머지 방향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 산성을 축조한 목적을 알기 어렵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축성 흔적이 서문과 통일신라 집수지(集水地)의 하층에서 확인된 것으로 보아 초축성과 수축성의 목적이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서문지와 서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유사판축으로 성토(盛土)한 토루(土壘)가 출토되었다. 이 토루에서는 삼국시대의 유물만 출토되었는데, 유물의 탄소 연대 측정 결과 5세기 전후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창녕 화왕산성이 초축된 시기를 알 수 있었으며, 5세기 이후 토루를 잘라내고 석축으로 성을 개축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축된 석축은 1단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석축의 내벽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또한 창녕 조씨의 득성지로 알려진 산성 내 집수지에서는 9세기 중반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집수지 아래에서 삼국시대의 집수지가 재확인되어 산성의 초축 시기와 수축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되었다.
화왕산 정상의 분지상 계곡부에는 용지(龍池)로 알려진 통일신라시대의 집수지가 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형태의 이 집수지는 화강암 석재를 가로로 평평하게 올려 호안(護岸)을 만들었다. 집수지 바닥에서는 9세기 중반의 해무리굽 자기, 철제 솥, 철제 초두, 청동 접시, 청동 합, 철제 다연, 철제 가위, 철제 자물쇠와 열쇠, 철제 대도(大刀), 철제 도자, 찰갑(札甲), 철제 재갈, 청동 방울, 호형등자, 목제인형, 목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이 사용된 시기와 창녕 화왕산성이 석축성으로 개축된 시기가 동일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물을 저장하는 집수지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이곳이 용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이곳에 용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창녕 화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9세기 중반경 석축성으로 개축된 산성이다. 고려 · 조선시대에는 외적의 침입을 당하면 창녕과 인근의 영산, 현풍의 현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입보성으로 이용되었다. 창녕의 진산에 축조된 성이지만, 산성에서 서쪽 방향만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은 초축 성벽이 서쪽에서 확인된 것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초축 단계와 수축 단계에서 성곽의 운영 목적이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분지 형태의 산성 내부 집수지 바닥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제사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진산에 축조된 산성의 기능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