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옥산성 ( )

옥산성지
옥산성지
건축
유적
문화재
삼국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조선 후기 거제부사 송희승이 수리 · 증축한 석축 산성.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이칭
이칭
수정산정, 옥산금성
유적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관련 인물
송희승
높이
5m
둘레
780m
면적
10,572㎡
소재지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산28번지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상남도
종목
시도기념물(1974년 2월 16일 지정)
소재지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산28번지
내용 요약

거제 옥산성(巨濟 玉山城)은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산1번지에 위치하는 수정봉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벽은 기반암을 정리하고 기단을 쌓은 뒤 성벽을 올린 것으로, 조선 후기에 들어 수리 · 증축한 것이다. 성 내부에서 2기의 집수지와 9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 중 집수지 1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시대에 재사용되었다.

정의
삼국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조선 후기 거제부사 송희승이 수리 · 증축한 석축 산성.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유적의 위치

거제 옥산성(巨濟 玉山城)은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산1번지에 위치한다. 옥산성은 거제의 주8인 계룡산 남서쪽에 홀로 솟은 수정봉(해발143m) 8부 능선을 따라 축조된 주9 석축 산성이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 780m, 높이 5m 정도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0호이다.

거제 옥산성은 『여지집성(輿地集成)』 「거제군읍지」와 19세기 고지도에 수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산성 내부에 건립된 축성비에는 '옥산금성이 1873년(고종 10)에 축성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성을 축성한 시기는 일치하지만 성의 이름은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거제 옥산성은 처음 만들어진 초축 성벽은 기반암을 정리하고 기단을 쌓은 뒤 그 위로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초축 성벽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 대대적으로 수리와 증축이 이루어졌다. 동문지의 경우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문지의 구조는 거제 중금산성의 남문지, 김해 분산성의 동문지 등 조선시대 후기 산성의 문지와 유사한 형태로 확인되었다.

거제 옥산성 2기의 집수지 중 집수지 1은 삼국시대에 초축된 것으로 조선 후기에 재사용되었는데, 3단의 계단식 주12 석축 구조로 되어 있다. 집수지 1의 규모는 직경 14m, 깊이 4.5m이며, 집수지 외부에 점토와 석재로 주13하였다. 집수지 바닥에서는 건륭통보와 상평통보를 비롯하여 분청사기 접시, 백자 등 조선시대 유물과 7세기 전반 경의 단각고배, 대부완 등도 출토되어 산성의 대체적인 운영 시기를 보여준다.

집수지 2는 건물지 1의 하부에서 확인되었다. 내부에 몽돌과 토사가 가득 채워져 있어 상부에 건물을 조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 집수지를 폐기한 것으로 보인다. 집수지 2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도기편과 기와편이 출토되어 이 집수지가 집수지1 보다 늦게 조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유적의 내부 구조

거제 옥산성 내부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모두 9동이다. 중앙에 있는 집수지 서쪽에 1동, 동문지 부근에 5동, 서문지 부근에 3동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1호 건물지의 규모가 가장 크다. 이 건물지는 동문지에서 성내 정상부로 향하는 계단의 북쪽에 위치하며 기단과 계단을 갖춘 초석 건물지로 확인되었다. 초석 건물지의 평면은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건물지 바닥에서 주11 12년명의 기와가 확인되어, 옥산성이 축조될 때 같이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건물의 벽은 흙과 돌을 섞어 올렸고 기초부에 회백색의 점토를 발라 주7하였다. 바닥에는 박석을 깔기도 하였지만 구들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1호 건물지는 성내 건물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커서 특별한 목적으로 축조된 건물로 볼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거제 옥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운영되다가 조선 후기에 대대적인 수리와 증축을 거쳐 재사용되었다. 삼국시대 테뫼식 성의 대표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물을 구할 수 있는 수원이 없는 지형적 한계로 주10 농성을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옥산성의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진 동치 계묘년(同治 癸卯年, 1873)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이어지던 시기로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척화비가 건립되던 시기이다. 동남 연해 성곽이 수축되던 시기와 일치하는 것도 옥산성을 수축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단행본

가야문물연구원, 『거제 옥산성 4호 건물지』(2022)
경상문화재연구원, 『거제옥산성지』(2019)
동서문물연구원, 『거제 옥산성 동문지 발굴(정밀)조사 약식 보고서』(2022)
동아세문화재연구원, 『거제 옥산성 정비사업부지 내 유적 정밀발굴조사 약식 보고서』(2021)
두류문화연구원, 『거제 옥산성 8호건물지 일원 발굴(시굴)조사 자문회의 자료』(2022)
삼강문화재연구원, 『거제 옥산성 1호 건물지』(2021)
삼도문화재연구원, 『거제 옥산성 정비사업부지 내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2021)
주석
주7

건축 공사에서 벽이나 천장, 바닥 따위에 흙이나 회, 시멘트 따위를 바름. 또는 그런 일. 우리말샘

주8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 조선 시대에는 동쪽의 금강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묘향산, 북쪽의 백두산, 중심의 삼각산을 오악(五嶽)이라고 하여 주산으로 삼았다. 우리말샘

주9

마치 띠를 두르듯 산 정상부를 빙 둘러 가며 쌓아 올린 산성. 우리말샘

주10

보(堡) 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음. 우리말샘

주11

중국 청나라 목종 때의 연호(1862~1874). 우리말샘

주12

강이나 바다의 기슭이나 둑 따위가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 우리말샘

주13

집터 따위의 바닥을 단단히 하려고 박는 통나무 토막이나 콘크리트 기둥. 우리말샘

집필자
정의도(한국성곽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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