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시험은 성균관 유생들의 거재(居齋) 학습을 장려하기 위한 제도였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성균관에서 수학 중인 거재유생(居齋儒生)이나 일정한 날 수 이상 거재하고 원점(圓點)을 취득한 원점유생(圓點儒生)만 응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후에는 거재유생이나 원점유생은 물론 성균관 유생이 아닌 일반 유생에게도 응시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조는 유생들의 성균관 거재 수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1743년(영조 19)에 50일 이상 성균관에서 거재하며 원점을 취득한 유생들만 성균관 절일제와 황감제에 응시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왕명으로 원점의 취득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유생에게 응시를 허용하기도 하였다. 이를 방외유생(方外儒生)에게도 허용한다는 의미로 ‘통방외’라고 일컬었다.
방외유생은 좁은 의미로는 거재하지 않는 성균관 유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통방외(通方外)’에서는 성균관 원점유생이 아닌 모든 유생을 가리킨다. 성균관 시험을 통방외로 시행하는 경우에는 생원 · 진사는 물론 문과 응시가 허용된 관료나 유학(幼學) 등도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통방외 여부는 시험 시행을 공고할 때 함께 공지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후인 1777년(정조 1)에 성균관 거재유생의 원점 규정을 더욱 강화하였다. 영조 대에는 한번 50점을 채우면 계속 절일제와 황감제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정조 대에는 필요한 원점을 30점으로 낮추는 대신 그 효력을 다음 해까지로 제한하였다. 2년마다 자격을 갱신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왕명으로 특별히 통방외를 허용하는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영조 · 정조 대에 통방외를 허용하는 시험은 원점을 적용하는 절일제, 곧 인일제, 삼일제, 칠일제, 구일제와 황감제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성균관 거재 유생을 위한 반제(泮製), 성균관과 사학의 재학 유생을 위한 일차제술(日次製述)과 관학유생응제(館學儒生應製) 등에도 통방외를 허용하였다. 이것은 성균관 시험에 성균관 유생이 아닌 일반 유생이 응시할 수 있는 길이 갈수록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