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은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조선 후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3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해상 방어 총사령부의 터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초대 통제사이며, 이순신의 한산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한산 진영이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1603년(선조 36) 현재 위치에 건물을 세웠다. 통제영은 292년간 유지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세병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다. 세병관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수항루가 복원되었다. 통제영은 현재 100여 동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확인되어, 국방 유적지로서의 중요성 및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다.
통제영은 1593년(선조 16)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직제를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이를 겸임하게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삼도수군통제영’으로 통칭되며, 약칭은 ‘통영’이다. 임진왜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한산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재란으로 한산 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뒤에도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고성현 춘원포(春元浦) 등지로 옮겨 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1603년(선조 36)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통제영을 두룡포(頭龍浦: 현 통영시 문화동)로 정한 이후, 이곳에다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605년(선조 38) 음력 7월 14일에는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인 세병관, 백화당, 정해정 등을 세웠다. 이후 1678년(숙종 4) 제57대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영문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높이 1장 반(약 4.6m), 둘레 1만 1730자(약 3.6㎞), 성가퀴 707개 규모의 평산성(平山城)을 쌓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의 통영성에는 4대문(大門)과 2암문(暗門) 그리고 3포루(鋪樓)가 있었고, 세병관을 위시하여 100여 개의 관아가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강점된 뒤 세병관을 제외한 대 · 소 관아 100여 동의 건물들이 모두 헐렸고, 그 자리에 학교, 법원, 검찰, 세무서 등이 들어섰다. 1975년 이후에 세병관 및 주변 지역을 정비하고, 1996년 지표 조사를 실시하여 유구를 확인하였다. 통제영 건물 중 현존하는 것은 2002년 보물로 지정된 세병관 뿐이며, 1987년에 복원된 수항루(受降樓) 1동이 있다. 수항루를 지나 우측에는 197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두룡포 기사비(頭龍浦 記事碑)가 있고, 좌측에는 매표소 및 관리사 건물이 있다.
통제사 내아인 운주당(運籌堂), 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건물이 들어섰다. 통제사 집무실이던 백화당과 각종 물품을 납품하던 공고(12공방, 선자방) 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들어섰다. 그 밖에 파취헌, 분뇨정 지역에는 충렬여자중학교와 충렬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서는 등 대부분의 지역에 공공건물이 들어섰고, 주변 일대는 일반 주택지가 되었다.
조선 왕조의 계획된 수군 군사도시로서, 현재 100여 동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확인되어, 국방 유적지로서의 중요성 및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다.